근대 조선 및 동아시아의 정치외교사 분야의 고전적 연구인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1897~1945)의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近代日鮮關係の硏究)』가 5년여의 번역 작업 끝에 상·하 2책으로 완역됐다.
조선총독부 중추원(中樞院)에서 조선 통치를 위한 참고자료로 1940년에 비밀리에 간행한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는 조선근대사 연구자들이 반드시 참조해야 하는 연구로 인정받아 왔다. 그것은 이 책이 1863년 고종의 친정(親政)부터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까지의 조선과 동아시아의 정치외교사를 상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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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조선 및 동아시아의 정치외교사 분야의 고전적 연구인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1897~1945)의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近代日鮮關係の硏究)』가 5년여의 번역 작업 끝에 상·하 2책으로 완역됐다.
조선총독부 중추원(中樞院)에서 조선 통치를 위한 참고자료로 1940년에 비밀리에 간행한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는 조선근대사 연구자들이 반드시 참조해야 하는 연구로 인정받아 왔다. 그것은 이 책이 1863년 고종의 친정(親政)부터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까지의 조선과 동아시아의 정치외교사를 상권 1,133쪽, 하권 969쪽에 달하는 방대하고 치밀한 서술로 다룬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이기도 하지만, 또한 19세기 조선·청·일본의 정부기록과 외교문서를 원문 그대로 수록한 일종의 외교문서집의 용도를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다보하시는 경성제국대학 교수이자 조선사편수회의 근대사 편찬주임으로서 사료 입수에서 막대한 편의와 행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에는 오늘날에도 입수하기 어려운 희귀한 문서들이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다. 이것이 처음 간행된 지 70여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여전히 국내외 학계에서 절대적인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이유이다.
다만 원서에는 서로 그 체제와 문체가 다른 조선·청·일본의 정부기록과 외교문서가 원문 그대로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전공자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모두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번에 출간되는 번역서에는 이들 문서까지 모두 우리말로 번역함으로써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실제로 19세기의 중요한 정부기록과 외교문서를 쉽게 접할 수 있게 했다.
근대 조선 및 동아시아 정치외교사 분야의 초기 연구는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의 주석 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학문적 영향은 심대했으며, 일본학계에서는 사실관계에 관한 한 이 책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할 정도로 아직까지도 정설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일 간의 근대사 인식의 차이를 확인하고, 아울러 우리 근대사 연구의 기원과 식민사학의 극복과정, 그리고 여전히 불식하지 못한 유산을 다시 확인한다는 점에서도 이 책의 번역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번에 출간된 하권은 시기적으로 1884년 갑신정변 직후부터 1894년 8월 1일 청과 일본이 개전을 선포하기까지의 10년을 다루고 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결과로 청일 양국 세력이 대립해서 마침내 개전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조선·청·일본 및 유럽 열강의 외교문서를 통해 실증적으로 규명했다. 하권 후반부에는 2개의 논문이 별편(別編)으로 수록되어 있다. 별편 1은 조선 후기 타이슈 번(對州藩, 쓰시마)을 매개로 한 조일관계의 특징과 변화과정을 이른바 역지행빙(易地行聘) 교섭과정을 통해 논술했으며, 별편 2는 타이슈 번의 채무 실태와 그 상환 과정을 통해 타이슈 번의 방만한 재정 운용 관행을 고발하고 일본사회의 전통적 지배계급이었던 사족(士族)이 메이지유신의 제도 개혁에 앞서 이미 경제적으로 몰락해 간 양상을 서술했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멸시, 청일전쟁의 책임론에 대한 불완전한 서술 등으로 인해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의 하권은 상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한 관심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깊이 음미해봐야 할 대목이 적지 않다. 예컨대 최근 국내학계에서 고종의 자주독립외교를 상징하는 사건으로서 한러밀약사건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데, 이 문제에 관한 본격적 연구는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가 처음이었다. 또한 하권의 상당 부분은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일본에 망명한 개화당의 행적과 암살 시도, 일본 자유당(自由黨)의 음모를 다루고 있는데, 이는 갑신정변의 실제 원인과 그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의 궁극적인 집필 의도는 조선의 정세가 어떻게 청과 일본 간의 대결을 촉발해서 결국 청일전쟁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동아시아의 외교사적 관점에서 규명하는 데 있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대립, 그리고 영국·러시아·미국·이탈리아 등 서구 열강을 대상으로 펼쳐진 중국과 일본, 조선의 치열한 외교적 교섭과 그 성패에 관한 서술은 오늘날 우리의 외교정책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 책속으로 추가 *
통신사의정대차사 정관 히라타 하야토, 도선주 시게타 도이노스케 등은 동래부사 류형이 이러한 의견을 갖고 있다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도착하자마자 훈도, 별차에게 접대를 요구했으므로, 훈도와 별차는 당연히 처음부터 난색을 표시했다. 훈도, 별차는 정관, 도선주, 관수 등의 설명을 듣고 난 후, “지난 덴메이 8년 무신년 통신사청퇴 대차사가 도착했을 때, 그것이 규외(規外)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특별히 그들을 접대하고 통신사 파견의 연기를 수락했다. 그런데 쓰시마에서 또 새로 명목을 지어내서 규외차사(規外差使)를 자주 보내는 것은, 조정의 관대함을 이용해서 접대물품을 탐하는 뜻이 없지 않다.”라고 힐난하고, 다시, “신사가 에도에 가서 전명(傳命)하는 것이 양국 간에 얼마나 중대한 일이며, 또 바꿀 수 없는 예(禮)이거늘, 비용을 절감한다는 핑계로 갑자기 쓰시마에서 전명할 것을 청하는 것은 무슨 도리이며, 무슨 예제(禮制)인가? 사체(事體)를 존중하는 도(道)에 있어 절대로 감히 이처럼 예에서 어긋난 말로 조정을 번거롭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하며 서계 등본의 진달을 거부하고, 또 대차사 원역(員役)의 왜관 퇴거를 요구했다. 정관 등은, ‘역지행빙은 결코 조약을 무시하거나 통신사의 예제(禮制)를 멸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일본이 근년에 조잔(凋殘)이 심해서 선례에 따라 영접을 거행할 여력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간이(簡易)하게 하는 데 힘쓰는 것’이라고 해명하고, 속히 서계와 예물을 봉납(捧納)해 줄 것을 간청했다.
훈도, 별차의 보고를 접한 동래부사 류형은 지난번 선문사(先問使)가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통신사의정대차사 그 자체가 규외(規外)라서 물리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사명(使命)의 내용으로 봐도 통신사가 국서를 받들고 에도에 들어가서 직접 간바쿠(關白)에게 전달하는 것은 약조에 명기된 바이니, 단순히 경비 절감이나 흉년을 이유로 이를 변혁하는 것은 사체(事體)를 존중하고 약조를 엄수하는 도리가 아니다.’라는 의견을 갖고 있었지만, 대차사는 에도 정부의 명으로 나왔기 때문에 자신의 권한으로는 결정하기 어려웠다. 이에 예조에 보내는 서계 등본을 진달하면서 동시에 대차사를 물리쳐야 한다는 의견을 장계로 아뢰었다.
동래부사의 장계는 12월 21일에 조정에 도착했다. 국왕은 바로 비변사에 내려보내서 품처(稟處)하게 했다. 비변사에서는 덴메이(天明) 8년의 통신사청퇴대차사조차 규외라서 물리쳐야 한다는 의견이었으므로, 이번 통신사의정대차사 같은 것은 거의 문제시되지도 않았다. 12월 25일에 좌의정 채제공은, “의빙(議聘) 두 글자는 실로 일찍이 없었던 것입니다. 왜(倭)의 교활한 실정이 참으로 몹시 악독합니다.”라는 이유로 동래부사의 장계대로 훈도와 별차를 독려해서 의정대차(議定大差)를 속히 척퇴(斥退)해야 한다고 아뢰고, 국왕의 재가를 얻은 후 비변사 관문(關文)으로 동래부사에게 명령했다.
이처럼 조선에서는 통신사 역지행빙을 무조건 거부했고, 이로 인해 타이슈 번은 조선과 막부의 중간에서 한때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졌다.
― ‘별편 1 조선 통신사 역지행빙고(易地行聘考)’ 중에서, 580~5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