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3ㆍ1독립만세의거로 인해 순국한 의사,
옥고를 치른 지사의 숭고한 정신을 수록!!!
◈ 도서의 개요
2019년 3ㆍ1독립만세의거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던 어느 날, 경성감옥(경성형무소 전신)에서 투옥 중이던 한 인물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이른바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속의 한 분이었는데, 비록 삭발하고 수인(囚人)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형형한 두 눈빛은 일제 관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성기(李成器)’!
그는 1919년 4월 4일 전북 남원 북시장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아우 용기(龍器)와 함께 징역 2년이 선고되어 경성감옥에서, 아우는 광주감옥 전주분감에서 옥고를 겪었고, 1977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분이셨습니다.
남원 북시장 독립만세시위 주도자로 피체되어 징역 1년 6월이 선고된 후 경성감옥에서 고초를 겪은 분은 김해근(金海根), 유창근(柳昌根) 지사 두 분이 더 계셨습니다.
필자는 소책자를 만들어 어느 모임에서 그것을 나눠드렸는데, 어떤 한 분이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계셨습니다. 갑자기 분위기는 숙연해졌고, 모든 시선은 그 사람을 향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경성감옥에 투옥되었던 인물과 눈물을 흘리는 분이 매우 닮았다고 느꼈던 순간이었습니다.
“…… 이분은 제 친할아버지입니다. 흑, 흐흐흐…….”
“아니…!”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계획하고, 이를 실천에 옮긴 것은 종교계 지도자들이었으니, 서울, 의주, 평양, 함흥, 해주 등지만 아니었습니다. 전북 전주, 임실 등지에도 천도교나 예수교(당시) 지도자들이 서울에서 보내온 「독립선언서」를 종교계 인사들에게 비밀리 전달해서 일으킨 거사였는데, 남원 3ㆍ1독립만세의거는 여느 지역과 달랐습니다.
당시 남원군 덕과면장 이석기(李奭器)는 전주이씨 영해군파(寧海君派) 집성촌인 사매면 대신리 사람들에게 4월 3일 도로 보수를 하는 모습으로 가장하여 계명당 고개에, 덕과면민은 사율리 동해골에 모이게 하고, ‘식수기념일’ 면민 수백 명을 동원하여 나무를 심은 후 만세시위를 벌였으니, 이석기를 비롯한 시위 주도자들이 남원헌병대에 유치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날 밤 사매면 대신리 전주이씨 사람들은 이성기의 집에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여 힘으로써 남원헌병대에 유치된 인사들을 탈환해 오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에 이용기는 자택에서 태극기를 그리고, ‘大韓獨立旗巳梅面’(대한독립기 사매면)이라고 쓴 깃발을 만들어서 이튿날 남원 북시장에서 대나무 끝에 매달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자 순식간에 1천여 명의 군중이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나서게 되었던 것인데, 그 시위 현장에서 일본 군경의 총탄에 5~8명이 순국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책은 제1부 「이성기ㆍ용기 형제 애국지사의 삶」을 엿볼 수 있게 엮고, 제2부 「남원 3ㆍ1독립만세의거」와 관련된 내용을 정리하였으며, 제3부 「판결문」으로 구분하여 엮었습니다. 판결문과 번역문은 남원 3ㆍ1만세의거 관련 13개와 남원ㆍ임실 출신이 함께한 임실 오수리 독립만세의거와 관련한 3개 등 총 16개를 실었습니다.
남원 3ㆍ1독립만세의거로 인해 순국한 의사, 옥고를 치른 지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남원 3ㆍ1독립만세의거의 진실이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