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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흥량 난행량

안흥량 난행량

  • 이상각
  • |
  • 아이필드
  • |
  • 2021-10-18 출간
  • |
  • 256페이지
  • |
  • 150 X 210 mm
  • |
  • ISBN 9788994620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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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어느 날 걸려온 전화 -- 글을 쓰게 된 계기
어느 날, 저자는 한 노인 분한테서 전화를 받는다.
“이 선생의 《이산 정조대왕》을 읽었습니다. 여기 태안입니다.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한번 만나볼 수 있을까요?”
태안향교의 전교로 봉직하고 퇴임했다는 그 노인께서 덧붙이신다.
“나는 독자들에게 우리 고향의 뜻깊은 역사를 알려주고 싶어요. (…) 당신이 좀 더 흥미롭게 써주시면 좋겠소.”
이렇게 해서 집필 작업에 들어갔다. 무엇을 쓸지 고민하다 어릴 적 놀았던 바닷가가 떠올랐고 안흥량의 험로를 피해가기 위해 개착했다는 운하가 생각났다.

고려, 조운이 끊기자 나라가 망했다
고려의 재정의 근간을 이루던 조운(漕運)이 무신란(1170년) 이후 정치적 기능이 약화되어 조운에 대한 행정력이 떨어지고, 원·명 교체기에 권력 공백 상태가 발생하면서 왜구의 침탈이 잦아졌다. 우왕 재위 14년간 왜구의 노략질이 무려 266회나 되었다. 신진사대부의 지원을 입고 실권자로 등장한 이성계는 조운 부활에 사활을 걸었다. 해운과 염철사업에 능한 왕강과 조운 정비에 일가견이 있는 노숭을 기용해 제도를 정비했다. 왕강은 운하 개착 사업을 이끌었고, 노숭은 조거(漕渠)와 수참(水站)을 설치하고 조전성(漕轉城) 축성을 제안했다.

“물길이 열려야 국운이 열린다.” -- 한양은 조운의 최적지
조선이 개국되고 수도를 정할 때 가장 중요시했던 것이 조운의 최적지 여부였다. 그곳이 한양이었다. 수도가 정해지자 고려 때 사용한 조창(漕倉) 점검에 나섰다. 왜구의 약탈을 어떻게 피할지, 조운할 때 자연적 환경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가 국정의 최우선 과제였다. 1395년 경상도 조운선 16척이 침몰하자 다급해졌다. 이런 사고는 매년 일어날 것이었다.

“조운을 회복하라!” -- 가장 시급한 국가 대사
조선의 실권자 태종은 마음이 급했다. 바다 쪽에 4곳, 강 쪽에 5곳의 조창을 세우고 조운 제도 확립에 큰 힘을 쏟았다. 평안도, 함경도처럼 물산이 적고 중앙에서 먼 곳은 잉류 지역이라 하여 현지에서 걷은 세금을 그곳에 두고 쓰게 했다. 임운이라는 사람에게 명령을 내려 배 500척을 건조하게 했다. 임운은 다음해까지 250여 척을 만들어 10만 2,314석을 한양으로 실어 나르게 했다. 소원대로 배는 만들었지만 왜구의 노략질은 여전했다.

왜구를 제압하니 난행량(難行梁)이 뱃길을 막네
노략질이 끊이지 않자 1419년, 왜구의 거점 대마도 정벌에 나서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왜구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포구 3곳을 열었다. 부산포(동래), 내이포(웅천:진해), 염포(울산) 등 이른바 삼포개항이다. 왜국과 관계가 안정을 찾으니 조창이 활성화되었다. 왜구들은 진정시켰지만 요소요소에 있는 험한 바닷길이 문제였다. 울돌목(명량)과 칠산량, 손돌목 등이 알려졌지만 뭐니뭐니해도 안흥량이 압권이었다. 난파 사고의 30%가 이곳에서 있었고 인근의 홍주, 비인, 서산의 바다가 뒤를 이었다.

안흥량, 조운선의 무덤이어라
1414년 8월 4일, 전라도 조운선 66척이 안흥량에서 난파되었다. 200여 명이 죽고 세미(稅米) 5,800석을 분실했다. 건국 초기, 세입 시스템을 정착시키지 못하면 국기가 흔들릴 것이다. 안전을 위해 매년 전라도의 400,060석을 전라 상도는 내포 지역에, 중도와 하도는 익산의 용안성이나 진포(군산)에 보관했다가 다음해 바다가 잔잔해지는 3월과 4월에 조운하게 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운하를 뚫어라!” - (1).굴포운하 : 일명 판개운하
서해안을 보면 충청남도 안면도를 경계로 오른쪽의 내해와 왼쪽의 외해로 나뉜다. 내해의 맨 위쪽인 천수만, 십수km의 땅을 통과하면 가로림만이 나온다. 두 곳을 잇는 운하 공사가 시작되었다. 험해 안흥량과 관장목을 피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고려 인종 때인 1134년에 시작하여 1391년(공양왕 3년)과 1412년에 굴착을 하였고, 1417년 순제성을 쌓았으며, 1461년 재논의되어 1464년 현장조사에 나섰다. 1535년, 1584년, 1658년, 1668년에도 논의가 있었고, 1669년에는 양쪽 만에 각각 창고를 지어 운송하는 ‘설창육수책’까지 마련해보았다. 실로 550년 동안 굳건히 이어진 시도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운하를 뚫어라!” -- (2).의항운하 : 일명 개미목운하
안흥량은 그렇다 치고 관장목이라도 피할 요량으로 굴착을 시도한 것이 의항운하, 일명 개미목운하다. 1521년 처음 논의되어 1522년 주청되었으나 유야무야. 1536년 이현이라는 사람이 제기했으나 의정부에서 반대했다. 1537년 2월 공사가 개시되어 7월 완공되었다고 알려왔다. 그러나 1538년 “의항이 메워졌다”는 보고가 올라왔는데 과연 공사가 완공이 됐는지 알 수 없다. 당시는 중종 연간, 정치적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던 시절이라 지방의 운하 공사 따위에 관심이 없었을 터였다.

“운하를 뚫어라!” -- (3).안면운하 : 일명 판목운하
굴포운하가 천수만에서 가로림만으로 직행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의항운하가 관장목이라도 피할 이유에서였다면 이 안면운하는 안면곶이라도 피해보자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안면곶 앞바다는 ‘쌀썩은여’라 했는데 종종 세곡선이 좌초되어 쌀이 썩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전 방경잠이 안을 내놓았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착공, 성공하였다. 그러나 삼남의 조운선은 여전히 안흥량, 관장목을 통과해야 했으므로 효과는 크지 않았다. 다만 서산 지역 세곡 운송에 다소 도움이 되었다.

대동법, 조운 시스템을 바꾸다 - 私船 조운 시대의 개막
민에게는 3가지 형태의 세금이 부과되었다. 토지세인 전세, 특산물세인 공, 인두세인 역. 이것을 쌀로 통일하자는 게 대동법, 그렇게 거둔 세미가 대동미다. 1569년 이이가 처음 주장했고 1708년 전국 세법의 표준이 되었으며 1754년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대동법 실시로 조운의 양이 엄청 늘었고, 쌀 외에 어물, 소금, 목재 같은 운송 이익이 크게 뛰어 경강(京江: 한강의 서울 부분) 상인단은 전국을 커버할 만큼 세력이 커졌다.
1656년 8월, 병선이 침몰하여 수군 1천 명이 죽었다. 병선은 조운선을 겸했으므로 이는 조운할 배들이 사라진 것이었고, 이후 조졸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1704년, 관선 조운제도를 공식 포기하고 사선 임운제도가 도입되었다.

사선 임운제도의 득과 실
이 제도가 도입되면서 백성이 직접 조창까지 운반할 필요가 없어져 노고는 줄었다. 그 대신 각종 잡비가 늘어났다. 또 곡물 횡령, 고패(故敗)로 인한 배 비용 청구 등 조정의 부담도 늘어갔다. 영조 때 경강선 철폐라는 강경조치를 취했으나 그렇다고 관선 조운으로 되돌릴 순 없었다. 조창 증설, 조군 확보, 조선 건조라는 3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조정에서 조운선 수송경비를 지불하지 않겠다는 발표를 하였고, 사선 선단에서 자율적으로 정하게 하였다. 이를 ‘작대제’라고 한다.

알아두면 더 재미있을 내용들
(1).《경국대전》(1485년 간행)에는, 필요한 조운선은 226척이며 해운조창 4곳에 165척, 수운조창 5곳에 71척을 둔다 했다. 종5품의 해운판관이 충청, 전라도를 맡고, 수운판관 2인 중 좌수운은 강원도와 충청 내륙을, 우수운은 황해도를 맡았다. 선군(船軍)은 1척당 10인, 여기에 수부(水夫) 10인을 더해 20인을 기선대(민병대)로 삼았다.
(2).배의 선장을 사공(沙工), 또 키를 조작한다 하여 초공(梢工)으로도 부른다. 사공들의 우두머리를 도사공이라고 한다. 해운의 조전선군(漕轉船軍)은 조군, 선군, 조졸, 격군(格軍) 등으로, 수운에서는 수부(水夫)로 불렀다. 조졸이나 수부에겐 각각 2결과 1.35결의 복호결이 주어졌고 각각 보인(保人) 2인이 생활을 책임졌다.
(3).18세기, 아산 공세창에서 서울까지는 운임이 10%, 익산 성당창에서 서울까지 20%, 그 이하 지역은 더 냈다.
(4).순풍일 경우 호남에서 서울까지는 4일 거리, 영남에서는 6일 거리였다. 난항일 경우 호남은 16~17일, 영남은 30일 이내로 주어졌다.
(5).삯은 도사공이 사공의 2배, 사공은 격군의 2배를 받았다.


목차


머리말 “올해도 바다만 풍년이라네.” 5
제1장 조선의 에너자이저, 조운선
01 고려, 조운이 끊기자 나라가 망했다 17
02 한양은 조운의 최적지였다 33
03 왜구를 물리치니 난행량이 가로막네 43
제2장 나는 전함사 종놈이라오
01 전함사, 조선의 배를 만들다 55
02 신숙주의 일타쌍피, 병조선 61
03 에헤라 데헤라 노를 저어라 67
제3장 대동법, 사선 조운 시대를 열게 하다
01 민생의 물꼬를 튼 대동법 77
02 사선 조운 시대가 열리다 81
03 애민군주 정조의 조운정책 89
제4장 안흥량, 조운선의무덤
01 안흥량은 난행량 103
02 만대 바다 고패 사건 117
03 막동 앞바다 난파 사건 126
제5장 파도가 남긴 이야기
01 마도4호선의 메시지 137
02 조운선 선원들의 나날 146
03 나랏돈은 빼먹은 놈이 임자 152
제6장 백년하청, 운하놀음
01 달걀로 바위 치기, 굴포 판개 169
02 파도 파도 무너지는 의항 개미목 177
03 꿩 대신 닭, 안면곶 판목 182
04 마지막 승부, 설창육수책 185
제7장 《조행일록》으로 보는 조선 후기의 조운행
01 성당창에서 세곡을 정비하다 199
02 웅포에서 출발하다 206
03 임무를 게을리한 호송원을 벌하다 209
04 안흥량, 관장목을 무사히 지나다 212
05 손돌목을 건너다 217
06 염창목을 거쳐 광흥창에 이르다 223
후기 “안흥하여 태안하라.” 233
참고자료 237
찾아보기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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