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계선의 ‘동물시편’ 연작 『은둔자들』과 『열마리곰』을 가득 채우고 있는 동물들의 이름은 시의 호명 대상이 아니다. 그 이름들은 여기 이 땅과 바다, 하늘을 나누어 쓰고 있는 뭇 생명들의 개별적이고 존엄한 ‘있음’의 당당한 발화이자 각인이거니와, 시는 그 생명들의 살아 있는 이야기를 듣는 자리에서 다시 태어나려 하고 있다. 인간의 척도가 허물어진 그곳에서 최계선의 시는 ‘앎’을 자랑하지 않고 다만 경청하고 고개 숙이는데, 그 순간 놀랍게도 마치 처음처럼 ‘시적’인 것은 발견되고 약동한다. 그렇게 생명의 ‘은둔자들’과 ‘열마리곰’은 한 번도 찾아온 적 없는 시의 신명을 개시하고 있다.
은거는 도피가 아니라 피난
멀리서부터 바람이 긴 팔 뻗어 빨랫줄의 광목천을 걷어갈 때
빗방울이 모두 조팝나무 흰 꽃으로 보일 때
그리하여 마침내 은둔의 숲에 들어섰을 때
그는 쥐오줌 소나기에 젖은 눅눅하고 너덜너덜해진 몸을 탁탁 털어
햇살 좋은 마당에 내건다
집게가 구멍 난 바람을 붙들고 있는 동안
양말이 꾀죄죄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동안
그는 잘 데워진 개울 자갈에 알몸 눕힌다
세상으로부터 걷어차이니 속 편하고
걸어 다니는 다람쥐 본 적 없듯
야단스럽게 뛰어다닐 일 없으니 하늘은 더 파랗고
벼룩만큼 높이 뛰지 않아도 밤송이는 때 되면 떨어지고
나무는 장대에 얻어맞지 않아도 되고
들꽃은 평생 처음 받아보는 관심에 부끄러워하고
가랑이 벌리니 흰 구름 흘러 들어오고
냇물도 곁에서 따라 흐르고
이 집 개 짖으니 저 집 개 짖고
시소타기 빼고는 혼자서도 심심치 않게 잘 노는 아이처럼
더없이 충분하고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은둔자는
다시 돌아올 계절을
앞서 마중나간 사람
―「벼룩」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