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춘추》를 지으니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했다”
‘역사와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하여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시인 김광규의 〈묘비명〉이란 작품의 마지막 구절이다. 그렇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역사’를 공부하지만 역사가 무엇인지, 어떤 쓰임새가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훗날 역사는 나를 (제대로) 알아줄 거야”라면서 자기 이익을 꾀하고, 무리하고 무도한 짓을 행하는 이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원로 사학자가 이 산문집은 이에 대한 답의 편린을 찾을 수 있다. 일반적인 역사책에서는 만나기 힘든, 역사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어서다. 통일과 전시작전권 문제 등에 오늘의 이슈나 한국 기독교의 반성 촉구까지 역사의 ‘그물’로 길어낸 성찰은 어쩌면 덤인지도 모른다.
“태정태세문단세” 외우는 게 역사공부가 아니다
이 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대목은 지은이의 역사관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민주주의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엄정한 역사의 잣대를 들이댄 점도 눈길을 끌지만 그렇다. “제주 4?3사건(1948년) 등 …… (우리 근대사의) 비극을 외면한 채 수백 년 전의 ‘태정태세문단세’만 음풍농월하듯 외우던 역사공부에 자괴감도 가졌다.”(250쪽) “현 시점에서 역사의 길이란 민족자주와 평화에 입각한 통일과 민주주의, 소외된 민중을 끌어올려 복지의 혜택을 받도록 하는 길이다. 그러기에 역사의 길은 형극의 길이자 수난의 길이다. 그 대신 현실의 길은 안락의 길이자 세속적 영화의 길이다.”(326쪽) 이런 글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원로 사학자의 모색
지은이가 2015년부터 약 6년간 언론과 페이스북 등에서 시사문제에 관한 생각을 정리한 글들을 중심으로 엮은 이 책에는 다양한 주제가 다뤄진다.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선 ‘개념의 재정립’이 필요하다면서 “남북이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이산가족이 소식을 자유롭게 주고받도록 하며, 남북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만 있다면”(12쪽) 하고 ‘헛꿈’을 꾼다. 그런가하면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했다는 한일 외무장관 공동 기자회견문을 두고 〈한일합방조약〉을 생각해낸다. 그 제1조에 한국 황제가 일본 천황에게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넘긴다고 한 1910년 〈한일합방조약〉을 떠올리는 글은 역사학자가 아니라면 언급하기 힘든 지적이다.
우리 속에 있는 ‘아베’ 깨우기를 권함
지은이의 시선은 엄정하다. 역사의 ‘거울’에 먼지가 앉지 않도록 늘 닦아둬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아베에게 진정한 사과를 요구하는 것 이상의 엄격한 자기반성이 먼저 필요한 이유다. 어쩌면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먼저 베트남 국민을 향해 진솔한 사과를 해야 한다. 민간 차원의 것 못지않게 국가적 차원의 사과와 피해보상이 뒤따라야 한다”(91쪽)란 구절이 대표적이다. “국익을 뒤로 감추고 제 잘못 사과하기를 거부한다면, 거짓 속에 숨긴 ‘미제’의 진면목이 드러나도 후안무치하다면,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해 자기 민족이 분열 이산되는 것도 수수방관하는 낯짝이라면, 이들은 모두 ‘아베’류로 간주한다”(89쪽)란 근거에서다. 이른바 ‘국뽕’을 경계하는 이러한 외침은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
역사에 살아있는 사람들, 그리고 내가 만난 역사학도
3장 ‘역사와 인물, 그리고 기록’은 비교적 부담 없이 읽힌다. 교우관계 등 지은이의 인간적 면모가 드러나는 글이 주를 이뤄서다. 소설가 황석영의 대표작 《장길산》에 ‘영감’과 소재를 준 고 정석종 영남대 교수, 북한 사학계와의 가교 구실을 한 중국 흑룡강성 사회과학원의 김우종 선생, 정규 교육과정을 제대로 밟지 못했음에도 100여 권의 저작을 낸 ‘재야사학의 별’ 고 이이화 선생 등의 인간적 면모, 그들과의 인연을 소개한 글을 읽노라면 우리 사학계의 ‘뒷골목’을 산책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물론 독립운동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선 일제의 기록에 크게 의지해야만 하는 독립유공자 심사제도의 한계(319쪽)를 지적하며 “기록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맹신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등 글의 긴장은 여전히 유지한 채다.
한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역사와 신앙
지은이는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합동신학교에서도 공부한 신앙인이다. 사학자로서, 신앙인으로서 교회를 다룬 글을 모은 4장 ‘한 그리스도인의 주변 읽기’는 ‘주변’을 벗어난다. 교회의 일제잔재 청산은, 종교적인 의미와 관련시켜 볼 때 신사참배를 회개하는 데서 시작되었어야 했지만 오히려 교회 분열의 도화선이 되었다(336쪽)며 아쉬워하는 대목이 신앙인의 눈이라면 “1960년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잘 살아보세’ 운동을 할 때, 한국 기독교회 일각에서도 요한 3서 2절을 인용, 복 바람을 일으켜 3박자 축복, 3박자 구원이라고 했다. 이 운동은 한국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키는 데에는 공헌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성경의 복 사상을 한국의 다른 종교의 것과 다를 바가 없도록 만들어버렸고”(351쪽) 같은 대목은 사학자의 시선이라 하겠다.
지은이는 2015년 가칭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을 알리는 기자회견장에서 “공자가 《춘추》를 지으니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했다”는 맹자의 말을 인용해 격려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살아있는 자들에 대해 ‘역사의 칼날’을 겨누는 글들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