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높이, 더 멀리 새 길을 걷는 어린이
김유진 시인은 첫 동시집 『뽀뽀의 힘』을 펴내며 “지금 어린이들의 심리와 감각에 알맞게 섬세하면서도 발랄하고 맛깔스러운 언어를 구사한다”(김은영)라는 평을 받은 바 있다. 7년 만에 펴내는 두 번째 동시집 『나는 보라』는 시인의 고유한 개성을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몇 폭은 더 원숙해진 시 세계를 선보인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며 세상으로 나왔던 아이는 7년의 시간 동안 훌쩍 자라나, 자기에게 꼭 맞는 운동화를 신고 거침없이 앞으로 달려 나가는 어린이가 되었다.
흙먼지 이는 길, 뭔가 숨어 있는 풀숲, 비 온 뒤 얕게 고인 웅덩이 조심조심 가리지 않고 이 운동화만 신으면 자꾸 달리게 돼. 엄지발가락이 앞코까지 빡빡하게 닿아도 내 발 모양대로 꺾이고 주름진, 색 바랜 운동화가 나를 달리게 해. - 「달려」 부분
7년의 시간 동안 어린이가 달라진 것은 성큼 커진 보폭뿐만이 아니다. “엄마 발자국 뒤를 가만가만 따르다”가 “엄마와 다른 길을 새로 걸어요”라고 결심한 어린 담쟁이(「담쟁이, 다른 길로」)는 “꽃 필 날은 내가 정해요”(「꽃의 순서」)라고 당당히 선언한다. 그리고 “똑똑하지 않다는 똑똑한 예상을 / 뒤엎는 // 어린이가 항상 이긴다”고 여유롭게 흥얼거린다(「어린이가 이기는 법」). 어린이 고유의 감정과 주체성이 쉽사리 무시당하곤 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기에, 더 높이, 더 멀리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어린이상을 다채로운 시어로 표현해 준 시인의 용기가 반갑다.
섬세하고 유희적인 감각이 노니는 동시집
『나는 보라』에 실린 60편의 시를 읽다 보면 독자는 감각이 활짝 확장하는 경험을 느낄 수 있다. 『뽀뽀의 힘』에서 “보라색 머리핀 하나”를 욕심내다 보라색 구두와 보라색 양말, 보라색 가방과 모자의 세계에까지 매혹되어 버린 어린아이(「보라색 머리핀 하나 사고 싶었는데」)가 두 번째 동시집의 표제작인 「나는 보라」에서 자신만의 오롯한 정체성을 확립한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특히나 큰 즐거움이다. 시인은 빨강과 파랑과 함께 어울리며 선명한 보랏빛 색채를 뽐내는 어린이를 통해 특유의 섬세하고 유희적인 감각을 자유자재로 펼친다.
빨강빨강보라였다가 빨강보라였다가 / 파랑보라였다가 파랑파랑보라였대도 // 보라는 보라 // 빨강 옆에서 빨강을 알게 하고 / 파랑 옆에서 파랑을 보여 주며 // 빨강과 파랑을 만드는 // 보라- 「나는 보라」 부분
김유진 시인은 색채뿐만 아니라 시간 또한 예민하게 감각한다. 방과 후 빽빽이 들어찬 학원 일정 때문에 친구와 마음껏 놀 수 있는 시간은 채 30분도 허락되지 않는다. 짧다면 너무나 짧은 시간이지만, 어린이들은 쉬이 투덜대기보다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만남을 기약한다. 자그마한 시간의 틈새에서 유희하는 시인의 발랄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4시 45분부터 5시 10분까지 맞지? / 나 발레 끝나고 / 너 영어 가기 전에 // 학원 차가 아파트 정문에 서니까 / 정문 놀이터에서 보자 / 더 많이 놀 수 있게 // 그럼, / 이따 만나 - 「이따 만나」 부분
시간을 늘이고픈 마음은 사회적인 애도로도 확장한다. 시인은 「벌새의 날갯짓이 보이는 시간」을 통해 “1초가 1분으로 흐르는 시간 / 벌새의 날갯짓도 보이는 시간”을 구한다. 이제는 꿈에서밖에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픈 슬픔은 “시곗바늘을 뒤로 감아” 60번의 초침소리를 가만가만 들음으로써 조금이나마 위로받는다. 시각과 청각, 촉각 등 여러 감각들이 공명하는 체험을 통해, 독자들은 마치 목화솜꽃 안에서 “솜사탕 같은 잠”을 자는 듯한 휴식(「목화솜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는 언제나 사랑으로 이긴다
『나는 보라』에 등장하는 어린이 화자들은 현실의 서늘함을 이미 깨우쳤다. “키 재기 눈금은 / 칸칸마다 아빠 주먹으로 뭉개졌는데 / 용서가 그걸 바꿀 수” 있을지 회의하고(「용서할 수 있을 때」), 어른들이 꾸며 낸 해피 엔딩엔 위선적인 구석이 있다는 것도 안다(「해피 엔딩」). 그럼에도 어린이들은 무지몽매한 어른들에게 인내심을 가지고, 언제나 이기는 것은 사랑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일깨운다. 시인은 첫 동시집의 표제작 「뽀뽀의 힘」에서 뽀뽀 한 방으로 어른을 반짝 일으켜 세우는 “뽀뽀의 힘“을 그려 낸 바 있다. 『나는 보라』는 그 핵심 메시지를 여전히 간직한 채, ‘해님과 바람’ 우화를 재치 있게 변주해 낸다.
나그네를 다시 만난 바람 / 그때 일이 분해서 / 휘이 휘이 휘이 세차게 내달렸더니 // 어? 나그네가 외투를 벗는다 // 추워하는 친구에게 건네고 / 어깨동무하며 다시 걷는다 // 오늘은 바람이 이겼다 / 언제나 사랑이 이기는 법 - 「언제나 사랑이 이기는 법」 부분
아픔 속에서도 씩씩하게 자라난 어린이는 원숙해진 감각으로 사랑을 노래한다.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미움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어른들은 따라 하지 못할 노래다. 이토록 속 깊은 마음을 가진 어린이 앞에서, 이제 어른은 무엇을 해야 할까. “젊은 할머니는 / 꼬마 엄마에게 // 어른 엄마는 / 늙은 할머니에게 // 책을” 주며 함께 마음을 나누고(「책을 줘요」), “길이 길로 이어진다 / 길이 길을 열어 준다”고 믿는 삶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밖으로 나오면」). 김유진 시인의 용감하고도 사려 깊은 노랫소리는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김지은의 말대로 어린이와 어른을 잇는 “공유의 열람석”이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