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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둔황까지

파리에서 둔황까지

  • 폴펠리오
  • |
  • 역락
  • |
  • 2021-06-21 출간
  • |
  • 316페이지
  • |
  • 153 X 225 mm
  • |
  • ISBN 979116742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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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본 역서는 폴 펠리오가 중앙아시아에서 둔황의 문서를 발견하기까지의 경위와 발굴한 자료들의 중요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구성했다.
폴 펠리오는 유럽의 다른 동양학자들과는 달리 특기할 만한 대중적 강의가 없다. 서평이나 주고받은 서신조차도 모두 전문 학술적 내용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범위와 대상 역시 ‘동양’ 세계를 모두 아우르고 있어, 글 제목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그의 연구 작업도 번역되어 소개된 경우가 거의 없다. 이러한 점이 펠리오 씨의 학문적 삶에 대한 일목요연한 정리를 어렵게 하고 있다.
그렇게 가치 없는 글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의 연구 작업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중국 고문을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고, 동서양으로 펼쳐진 폭넓은 학문적 지식을 요구하고 있다. 파리에서 중국으로 가는, 육로이든 바닷길이든, 여정의 모든 대상이 자신의 연구 영역이나 되는 것처럼 주제의 선택은 자유롭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언어적 탁월함과 천재성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점들이 펠리오 연구 작업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했다. 이제 역자는 처음으로 그의 연구성과 속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이고자 한다.

이 책이 나오기 몇 달 전, 역자는 『8세기 말 중국에서 인도로 가는 두 갈래 여정』이라는 펠리오 씨의 장편 연구성과를 역주하여 출간했다. 냉정하게 평가해보더라도, 이 책은 세계 최초로 1세기 만에 펠리오의 연구를 재탄생시킨 것,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 육중한 글을 역주하면서, 언제나 생각했다. “이 책을 누가 볼 수 있을까?” 또는 “너무 깊게 들어가는가?” 아니면 “이 책으로 이끄는 안내서가 필요하지는 않을까?” 등등의 생각이 들었다. 전문학자가 아니라면, 들어본 적도 없는 단어, 용어, 지명, 학자들의 출현들은 분명 독서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결국, 두 편의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기로 마음먹고, 먼저 『파리에서 둔황까지』를 완성했다. 당연히 『파리에서 둔황까지』를 우선 출간하려, 두 곳 출판사 문을 두드렸다. 한 곳은 심사숙고 끝에 손을 들었고, 지방의 한 곳은 원고를 고려조차 하지 않은 듯했다.
역자는 ‘전문학술’ 도서와 ‘교양’ 도서로 구분하여 언급하고 싶지 않다. 인류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에는 그 필요성이 있다. 말하자면, 전문학술과 교양의 경계가 무엇이냐는 반문이다. 분명 『8세기 말 중국에서 인도로 가는 두 갈래 여정』은 낯설고 부담스러운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부디 『파리에서 둔황까지』가 이러한 무거움을 덜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파리에서 둔황까지』는 동서양 문화교류, ‘실크로드’ 또는 둔황 석굴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독자라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의 자료를 준비하였다. 어쨌거나, 적어도, 생소하지는 않으니까. 이 책은 펠리오 연구 세계의 근간을, 그의 목소리를 통해, 추적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발표된 연도 순서로 본다면, 「중앙아시아에 관한 몇 가지 설명」(1906), 「감숙성에서 찾은 중세 도서관」(1908), 『오뜨아지에서 보낸 3년』(1909), 「동투르키스탄 조사보고서」(1910), 『오뜨아지』(1931), 「펠리오의 학문적 삶」(1950)입니다. 그러나 내용의 시간적 흐름과 상호 연관성에 따라, 오뜨아지에서 보낸 3년, 감숙성에서 찾은 중세 도서관, 동투르키스탄 조사보고서, 중앙아시아에 관한 몇 가지 설명, 오뜨아지, 펠리오의 학문적 삶으로 그 순서를 조정했다.

먼저 『오뜨아지에서 3년(Trois Ans dans la Haute Asie)』은 엄격히 말하자면 펠리오가 직접 쓴 것은 아니다. 펠리오가 둔황에서 돌아온 1909년 12월 10일 소르본 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학회 회원들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발표한 내용을 기록 편집한 글이다. 이 강연록은 『프랑스 아시아위원회 회보(Bulletin du Comit? de l"Asie fran?aise)』, 1910년 1월호에 실렸는데, 그것을 발췌하여 프랑스 아시아위원회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한 책이다. 펠리오는 프랑스 탐사대가 오뜨아지에서 3년 동안 어떻게 활동했고 어떤 성과를 냈는지, 그간의 경위를 사진 전시와 함께 보고하고 있는 현장으로 이끈다. 이 자료는 2차 연구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펠리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1세기 만에 다시 보물을 들고 개선하여, 펠리오 씨가 이제 우리에게 연설하고 있는 듯하다. 1세기 전, 프랑크 왕국 후예들의 무지가 재연되지 않기를 바란다. 여기 ‘오뜨아지’란 표현은 몽골지역과 쿤룬산맥 북부의 중앙아시아 전역을 지칭한다. 중국에서는 ‘신장지역’으로 번역하곤 하는데, 대응하는 영역이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서는 펠리오 씨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두 번째 자료는 「감숙성에서 찾은 중세의 도서관(Une biblioth?que m?di?vale retrouv?e au Kan-sou)」란 제목으로 『극동프랑스학교 학보(Bulletin de l"?cole fran?aise d"Extr?me-Orient)』, 1908년(제8권), 501~529쪽에 수록된 펠리오의 글이다. 당시 펠리오 탐사대의 최고 책임자였던, 아시아협회 회장 에밀 세나르(?mile Charles Marie Senart, 1847~1928) 씨에게 보냈던 일종의 보고서 형식의 서한으로, 『극동프랑스학교학보(BEFEO)』 편집자들이 최대한 원문을 살려 편집한 것이다. 이글로 볼 때, 협회 측에서는 펠리오가 이끄는 탐사대의 활동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들은 경쟁하는 국가에 내놓을 만한, 소위 ‘빛나는’ 또는 ‘최초의’ 성과를 내라는 채근이 심했다. 다시 말해,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러시아, 영국, 네덜란드, 독일, 일본이 경쟁하고 있었고, 후발주자였던 프랑스팀은 다른 나라의 탐사대가 지나간 곳만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때문인지 펠리오는 곳곳에서 탐사대가 찾은 것에 대한 의미를 구차할 정도로 역설하고 있다.
본국 학계의 안목으로 보았을 때, 둔황 석굴의 문서들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며, 얻어낸 화려한 ‘전리품’에 비하면, 그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파악하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보물을 들고 왔으나 보물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펠리오 씨는 둔황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발굴했으며, 그것들이 인류사에 얼마나 소중한 ‘보물’인지를 조목조목 들어 설명했다.
현장에서 쓰인 이 글은 펠리오의 중국문화와 문학에 대한 조예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가장 잘 보여준다. 펠리오는 아우럴 스타인(영국탐사대)보다 8년이나 늦게 둔황에 도착했지만, 그가 발굴한 자료들은 스타인이 가져간 것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귀중하면서도 가치 있는 것들이었다. 왜냐하면, 펠리오는 여러 아시아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과 중국학에 관한 폭넓은 지식을 토대로, 직접 자료들을 선별해 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럽의 동양학자들에게 둔황 자료의 중요성은 한참 뒤에나 인식되었다. 비록 소르본 대학 대강당에 많은 학자가 운집해 경청하고 있었지만, 알아듣는 사람은 드물었고, 그들은 냉담했다. 우리 또한 둔황 장경동에서 발굴된 펠리오의 문서들에 대해 그 중요성을 잘 모르고 있을뿐더러, 그 정보들도 간접적인 자료에 의한 것들이었다. 펠리오의 이 ‘간곡한’ 서간문이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학술지에 논문형식으로 편집·수록되어 참고도나 사진이 없다.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다른 자료에서 몇 장 추출하여 보탰다. 그 짧은 시기, 그 열악한 조건에서 이와 같은 해제를 써낸 펠리오의 열정과 초인적인 기억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 번째, 동투르키스탄 조사보고서(1910)는 금석문 및 문학 아카데미(Comptes rendus des s?ances de l"Acad?mie des Inscriptions et Belles-Lettres) 학기 보고서, 54년도, 1호, 1910, 58~68쪽에 수록된 글이다. 이 보고서는 앞서 본 「감숙성에서 찾은 중세의 도서관」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둔황의 자료가 어떤 의미가 있으며, 향후 유럽의 중국학계에 불러온 변화, 그리고 프랑스가 중국학 연구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기술하고 있다. 특히 둔황에서 북경으로 들어와 수 만권의 중국 문헌 자료를 확보해 가는 과정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는데, 이러한 북경에서의 학술 활동은 이 문건에서만 볼 수 있는 내용일 것이다.

네 번째, 중앙아시아에 관한 설명(1906)은 일종의 조사보고서로, 『BEFEO』, 1906(6), 255~269쪽에 수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서 언급한 고고학적 조사는 펠리오의 탐사대가 카슈가르에 도착하여 첫 번째 이루어낸 학술 활동이므로, 본 편역에서 첫 장에 위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펠리오 일행이 그곳에서 발굴한 것에는 주목할 만한 것이 사실상 없으므로, 그다지 학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그만큼 소개도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생소한 지명과 기술들이 많이 보이기 때문에, 독서의 ‘편의’를 고려하여 조정했다. 이 자료는 카슈가르 북쪽에 있는 ‘세 석굴[三山洞]’과 테구르만(Tegurman) 유적에 관한 보고서로, 앞서 다녀간 아우럴 스타인이 언급하지 않은 곳이다. 다시 말해서,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대체로 도자기 조각들에 불과하지만,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유적의 지리적 환경과, 구성 그리고 문화에 관한 자료로는 유일하다. 특히 중국 공주에 관한 전설을 원음 그대로 로마자로 옮기고[본서에서는 생략함] 번역하여 소개한 것은, 펠리오 씨의 학문적 자세를 잘 보여준다.

다섯 번째 자료는 파리, 에디션 아티스티크(L"E?dition artistique)에서 1931년 단행본으로 출판된 『오뜨아지(La Haute Asie)』로서 “오뜨아지에서의 탐사와 여행(Explorations et voyages dans la Haute Asie)”라는 부제목이 달린 소책자이다. 이 자료는 사실 파리에서 둔황까지라는 책의 이름에 부합하지 않고, 연대도 유난히 이후에 이루어진 문건이지만 여기에 함께 수록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펠리오 씨는 ‘오뜨아지(Haute Asie)’라는 자신만의 고유한 용어를 사용한다. 1장에서 둔황 석굴의 성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도, 『오뜨아지에서 보낸 3년』이라고 언급했다. 오뜨아지란 ‘상부 아시아’란 의미로, 일반적으로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그리고 히말라야 사이의 영역을 지칭한다. 따라서 티베트, 신장, 몽골지역을 포괄한다. 중국의 학자들은 ‘신장’으로만 번역하는데 차이가 크기 때문에 ‘오뜨아지’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 지역에서 펠리오 탐사대가 이루어낸 학술 자료들은 매우 전문적이고 그 양도 상당하다. 펠리오 탐사대는 다른 나라에 비해 늦게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만큼 더 많은 자료를 확보하려 했고, 그만큼 학문적 기술에서 심혈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다. 본서에서 간략하게 요약하여 가늠해볼 정도의 작업이 아니다. 그러나 이 소책자는 이러한 학술 활동의 요약집이라고 할 정도로, 오뜨아지의 전체적인 면을 잘 개괄하고 있으므로 본서에서 함께 소개한다. 에밀 가스파르돈(Emile Gaspardone, 1895~1982)의 서평에 따르면, 이 책은 마지막 시트로엥 미션(Mission Citro?n)을 기획한 사람들의 요청으로 작성되었다. 오뜨아지의 지리적 설명을 시작으로, 오뜨아지의 기원부터 오늘날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말하자면 오뜨아지의 약사(略史)인 셈이다. 게다가 그 지역 민족들에 대한 엄격한 기술을 보탰고, 그 문화 속에서 오뜨아지의 정치적, 종교적 역할을 다뤘다. 말하자면, 오뜨아지에 관해 종합적인 개술로서는 이만큼 정확하고 간략한 책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매우 희귀한 자료라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이 소책자는 이처럼 오뜨아지의 역사, 문화, 종교, 언어를 개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향후 사후 유작으로 출간된 『몽골비사』를 요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며, 특히 칭기즈칸의 삶을 소개하는 부분은 매우 인상적이다.

옛 중국 문인들처럼 『연보』 같은 것이 있으면 삶을 조감하기 수월하련만. 앞서 언급했듯이 펠리오의 학문적 열정과 활동을 전체적으로 개괄해 내기는 쉽지 않다. 이 난관을 풀어보기 위해 동시대 학자의 힘을 빌려보고자 마지막 장을 구성했다. 동시대의 인도학자 루이 레누(Louis Renou, 1896~1966)의 「아카데미 임원인 폴 펠리오의 삶과 작업에 관한 기술(Notice sur la vie et les travaux de M. Paul Pelliot, membre de l"Acad?mie)」이란 글이다. 추모 성격의 이 글은 『금석문 및 문학의 아카데미 학기 말 보고서(Comptes rendus des s?ances de l"Acad?mie des Inscriptions et Belles-Lettres)』, 제94회(2호, 1950), 130~144쪽에 실렸다. 펠리오의 전체적인 학문 활동을 학계와의 관계성, 연구의 의미 등을 고려하여 균형 있게 잘 개술하고 있다.

펠리오 씨는 자신의 어학 능력과 중국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탐사에 앞서 철저한 사전준비와 선행 연구를 빠짐없이 검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많은 서구의 동양학자들이 등장하는데, 우리에게는 대부분 생소한 학자들이다. 펠리오 씨의 연구 세계를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가능한 논의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유념하면서, 이들에 대한 활동 정보를 담은 각주를 붙였다. 2장과 6장에는 사진이나 참고도가 수록되지 않았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펠리오 탐사대가 촬영한 것을 중심으로 몇 장의 참고 사진을 실었다.

우리는 ‘실크로드’라고 하면 연상되는 단어는 둔황이고, 둔황하면 법현, 현장, 혜초 같은 구법승을 떠올리며, 혜초라고 하면 바로 『왕오천축국전』을 알아본 폴 펠리오를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그런데도 폴 펠리오에 관한 책들은 우리나라에 한 권도 소개되지 않았다. 우리에게도 20세기 서방 탐험가들의 여행기록이 상당수 소개되었고, 나아가 직접 실크로드를 탐방하며 쓴 여행기도 속속 출간되고 있다. 그런데도 20세기 초의 탐사기록과 그들이 남긴 흑백 사진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게다가 우리는 펠리오 자신의 목소리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혁혁하고 흥미진진한 모험담에 이끌리다 보면 정작 그 중요한 의미를 간과하기에 십상이다. 표의문자를 몰랐던 사람들에게 한자는 정말 불가사의한 글자였겠지만, 한자문화권에 사는 우리에게는 별다른 것이 없다. 저들이 중요하다고 하여 우리에게도 유의미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국립박물관에도 ‘오오타니 컬렉션’이란 둔황과 중앙아시아의 유물이 소장되어있다. 작은 ‘편린’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전체를 구성하는 것이었으므로, 우리와의 관계성을 찾아가야 한다. 역자는 본 역서가 그러한 질문의 출발선에 서 있기를 바란다.
-역자의 말 중에서


목차


역자의 말 09

오뜨아지에서 보낸 3년 23
1909년 12월 10일 소르본 대학 대강당에서 행한 펠리오의 콘퍼런스

감숙성에서 찾은 중세 도서관 69
중앙아시아 탐사를 담당한 극동프랑스학교(EFEO) 교수 폴 펠리오

동투르키스탄 조사(1906~1909)에 관한 폴 펠리오 씨의 보고서 139

중앙아시아에 관한 설명 155
극동프랑스학교 중국어 교수 폴 펠리오

오뜨아지 175

학술원 임원인 폴 펠리오의 삶과 작업에 관한 설명 249
루이 레누(Louis Renou, 학술원 임원)

부록 295

역자 후기 304

찾아보기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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