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의 저자가 이 시대의 모든 50대와 나누고자 하는 절절한 공감과 희망의 메시지!
인생은 나를 파는 여정이다.
사람은 스스로를 다듬어 좋은 가치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다. 우리는 왔던 길을 돌아보면서 살아야 한다. 그곳에서 나의 가치를 발굴하고 판매를 해야 한다.
그것이 사람이 사람됨과 사람다움으로 거듭나는 길이다!
고통은 오르막길일 뿐 담담히 지나가면 된다!
무엇이든지 새로움과 모험을 준비하는 시작이 있다. 시작을 지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느낌도 생산된다. 과정에서 얻게 되는 성장과 실패는 모두 다 성장이고 인생 성과이다. 과정에서 얻는 양면을 알아가고 포용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이것은 내면을 숙성시킬 수 있는 내공을 기르는 반복적인 과정이다. 그것이 참살이(Well Being)의 준비라고 생각한다.
나는 뒤로 가는 세상을 꿈꾸며 이 글을 쓰고자 한다. 진보와 발전의 혜택을 누리며 불행한 장수를 누릴 것인지, 여기서 뒤로 돌아 초라하지만 재밌게 노는 나를 찾아 장수할 것인지 말이다. 나는 현대적 삶에 완전히 학습된 사람이다. 하지만 몸은 그렇게 되었을지라도 정신은 아직 아니다. 이글을 통해 후진 작업을 하고 싶다. 반시대적 상상을 하고자 한다. 여기서부터 나는 ‘의미’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숙제를 얻은 것이다. 마음을 가볍게 할 수 있는 시작점을 찾아야 한다는 숙제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 시작점이 뒤돌아보는 반성이다.
대한민국에서 현재를 살고 있는 나와 같은 나이 50이 넘어가는 분들은 많다. 그 지점을 살고 있는 우리는 다양한 경험과 느끼는 바가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분들을 대신해서 좁고 얕은 영역이나마 표현하고자 한다.
대가족 구성, 협동, 어울림, 연대 등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의 의미를 뒤로 가는 길목을 찾는 과정 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1969년생이 50이 넘은 나이에 나를 비추어 보는 반성의 글이다. 반성은 이전의 무엇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잘못을 반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여기에서 반성은 뒤로 가보고 거기에서 앞을 보자는 뜻도 있다. 뒷걸음은 더 멀리 앞으로 뛰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니체는 “심연의 고통의 깊이를 극복하는 순간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이 오히려 인간을 더욱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살다보니 그러한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고통을 회피하는 것만이 방법은 아닐 것이다. 진정한 해방감은 회피가 아니라 직접 맞장 뜨는 데서 올 수도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학의 발전과 사람살이의 진보를 보고 있다. 하지만 주위 분들의 말을 들으면 “옛날이 좋았지! 지금은 재미없어”라고 표현한다. 과거와 비교해 지금 사람들은 마음에 짐이 많다. 육체적인 편리함의 증가에 따른 정신적 피곤함이 가중되는 비례 현상이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개인불만이 커지는 현상을 우리는 보고 있다. 개인의 행복과 문명의 발달은 공존 가능한 이야기인가? 인간의 파괴와 통합, 소유본능에 의해 국가는 탄생했다. 국가는 법과 양심교육으로 죄책감을 만들어 국민을 다스린다. 우리는 국가에 살고 있다.
현대는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산업화에 의한 인간생활의 편리함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설적인 현상을 목격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머리 위에 무거운 장식을 항상 달고 다닌다. 무슨 데코가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잘 사는 것 같은데 불행하다는 목소리가 높아가는 현실이다. 상대적 빈곤, 사회 양극화, 분주함, 경쟁, 갈등, 낙오, 소외 등에서 자유스럽지 않다. 우리는 인간이다. 고대 이래로 이성적 성취감을 높게 평가하고 추구하는 동물이다. 행복을 인간살이의 목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인간정신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다. 반면 재미를 추구하는 동물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의미를 찾는다.
-(중략)-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진 현대적 삶은 과거와 어떻게 다른가?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선택지가 많은 시대에 욕망을 욕망하는 시대이다. 그에 따른 마음에 병이 양산되는 현대적 삶이다. 나는 이러한 삶이 우리들의 자유와 행복을 흐려지게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기를 들고 싶다. 모든 것의 진보만이 우리들의 목적인지 스스로 질문해 보아야 한다. 몸은 좀 불편해도 마음이 풍요로운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농경사회로? 말이 안 되는 소리?
나는 뒤로 가는 세상을 꿈꾸며 이 글을 쓰고자 한다. 진보와 발전의 혜택을 누리며 불행한 장수를 누릴 것인지, 여기서 뒤로 돌아 초라하지만 재밌게 노는 나를 찾아 장수할 것인지 말이다. 나는 현대적 삶에 완전히 학습된 사람이다. 하지만 몸은 그렇게 되었을지라도 정신은 아직 아니다. 이글을 통해 후진 작업을 하고 싶다. 반시대적 상상을 하고자 한다. 여기서부터 나는 ‘의미’라는 것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숙제를 얻은 것이다. 마음을 가볍게 할 수 있는 시작점을 찾아야 한다는 숙제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 시작점이 뒤돌아보는 반성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600만 년 전부터 이어져 오는 인간 진화의 최종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은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는 ‘화두’이기도 하다. 사람은 하루 종일 자기와의 대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 있어서도 지속적으로 자기와의 대화는 이어진다. 어떤 작용에 의해 나는 나와 대면하고 있는가? 내안의 본능과 자아, 초자아의 갈등은 인간의 숙명인가? 갈등은 내가 일으키는 나의 마음으로부터 생산되는가? 그러한 내면의 대화는 나를 어떤 존재로 만드는가? 생각이라는 기능을 소유한 인간 종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지난 50년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생각하건데 어처구니없는 실수도 많이 하고 살았던 것 같다. 후회와 반성이 교차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50년 세월이 짧지는 않다. 그래서 한번 뒤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중략)-
나는 세상을 살면서 느꼈던 바를 될 수 있으면 진정성을 유지하며 쓰려고 한다. 내가 이해하고 느꼈던 것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이다. 사람 사는 세상이 나에게 선물한 부대낌을 표현하고 싶다. 내가 대면하는 세상과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작은 씨앗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은 씨앗이 열매가 되어 숭고하게 익어가는 통로를 보고 싶다. 단 한 문장에서라도 씨앗이 발견된다면 나의 소임을 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