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詩意를 품은 그림을 만나다
글에 곁들이는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작가의 그림 실력일 수도 있고, 화풍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독자의 기억에 가장 남는 건 화가가 작품을 얼마나 충실히, 독창적으로 재해석해서 표현했는가일 것이다. 같은 글을 두고도 그린 사람에 따라 아예 다른 그림이 나올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글의 본질을 꿰뚫은 그림은 언제나 보는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물론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문학의 경우, 이미 알려진 고정된 이미지와 해석 때문에 그림 작가로서 표현할 수 있는 상상의 폭이 더욱 제한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참신한 해석과 감성을 바탕으로 글과는 또 다른 예술성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바로 이 책 《펑쯔카이 만화 고시사豐子愷漫畫古詩詞》에 실린 펑쯔카이의 그림이 그렇다.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것은 사실 중국화中國畵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중국화에는 “시취詩趣”와 “시의詩意”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지고 생동감 있게 움직인다.
20세기 중국 현대만화의 시조이자 교육가, 서예가, 그리고 문화활동가였던 작가 펑쯔카이(?子愷, 1898~1975)가 한 말이다. “문학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시”라고 했다는 그는 시의詩意와 시경詩境이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화가일 뿐 아니라 시인으로서의 자질도 갖추었던 펑쯔카이는 시의 표현 방식과 예술적 경지, 시적인 맛과 감성을 중시했고 기민하게 세계를 관찰하고 그림으로써 자신의 소회를 풀어놓았다.
물론 시의는 중국화의 정신이라 할 수 있으므로 펑쯔카이만의 것은 아니지만, 그의 그림에 담긴 시의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며 쉽게 공감대를 형성한다. 고전을 자신만의 눈으로 해석해서 새로운 것을 이끌어 내고 재창조한 작품 속에는 청대의 학자 왕국유王國維가 말한, 대가만이 이를 수 있는 ‘의意와 경境이 혼합된 경지’가 서려 있다.
예술가 펑쯔카이가 바라보는 세상
펑쯔카이의 그림은 한마디로 담백하고도 세련되었으며, 위트가 넘치고 유머가 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정겨운 모습에 당시의 상황과 인물의 성격까지도 담아 그려내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이를테면 신기질辛棄疾의 〈자고천??天·악취 가득한 세상에서掩鼻人間臭腐場〉는 술을 즐기는 화자를 정면 그대로 보여주며 허심탄회한 심경을 그리지만, 잠삼岑參이나 이청조李淸照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별을 겪은 여인은 뒷모습이나 옆얼굴만으로 온몸에 서린 슬픔을 보여준다. 민국 시절 군복을 입은 군인들을 그린 두보杜甫의 〈전출새前出塞〉나, 송대 무희를 드레스 차림의 여인이 춤추는 모습으로 묘사한 유극장劉克莊의 〈청평악淸平樂·춤은 틀려도宮腰束素〉에는 유머 감각과 함께 모던함까지 담겨 있다.
펑쯔카이 그림을 보다 보면 아이가 많이 등장한다. 아이는 “몸과 마음이 열린 사람”이라며, “오로지 아이들만이 자연에 통제받지 않고 사회적 관습에 지배받지 않는 창조자”라고 말했던 펑쯔카이는 조카까지 거두어서 총 일곱 명의 자녀를 정성으로 길렀고, 그 마음 씀씀이는 그림에도 고스란히 담겼다. 그는 이 아이들을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원매가 지은 〈우연히 절구 다섯 수를 짓다偶作五絶句〉처럼 아이들이 중심인 시는 물론이요, 악비의 〈북벌에 나서는 자암 장 선생을 보내며送紫巖張先生北伐〉에서도 아이들이 등장한다. 남송의 명장 악비가 지은 사이니 흔히 장수의 장엄함을 그릴 법한 상황에서도 펑쯔카이는 연령대가 다른 아이들이 함께 전쟁놀이를 하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전쟁을 바라보는 냉철한 시선과 아이를 지켜보는 어른으로서의 유머와 따스함을 잃지 않았다.
중국 고전 시와 사를 가장 확실하게 즐기는 방법
이 책은 한·육조부터 민국 초기까지 중국의 시와 사를 시대순으로 나열하고 있지만 단순한 시가선집도, 만화집漫畵集도 아니다. 《펑쯔카이 만화 고시사》는 예술가 펑쯔카이가 수많은 중국의 시와 사 중에서 고르고 고른 작품들에 직접 그린 그림을 곁들인 책으로, ‘현대 중국의 최고 예술가’ 중 하나로 평가되는 작가가 고전 시사에 담긴 옛이야기를 현대라는 무대로 옮겨와 새롭게 재해석한 또 하나의 창작집이다. 여기에는 아름다운 절강성 수향마을에서 자라나며 길러진 펑쯔카이의 감수성과 사범대학, 미술대학을 다니며 체화한 지적·미적 소양, 그리고 그의 예술적 재능과 인생의 일면이 오롯이 담겨 있다.
중국 고대부터 당송팔대가, 그리고 명청시대와 민국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떨쳤던 문학사가들의 마음을 울리는 명시名詩와 명사名詞는 담백한 그림이 곁들어지면서 한층 그 풍모가 살아났다. 글의 단정하고도 고결한 단어와 분위기를 한층 살려주는 펑쯔카이의 절제되고도 수려한 그림을 함께 보면, 일상의 팍팍함을 잠시 잊고 그 여유로움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