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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랑

  • 이광수 ,민병덕(엮음)
  • |
  • 정산미디어
  • |
  • 2011-10-31 출간
  • |
  • 456페이지
  • |
  • 153 X 224 X 30 mm /774g
  • |
  • ISBN 9788993117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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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① 이 책은 1950년 3월 10일 박문출판사 발행 ‘사랑’ (상)ㆍ(하)를 저본으로 삼았다. 이 간행본은 춘원 선생이 1950년 6ㆍ25로 납북되기 전에 간행된 것이므로 작자 감정본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1957년 11월 15일 광영사 발행 ‘사랑’과 동일하며, 1939년 간행 ‘현대걸작장편소설전집 제1ㆍ제2’의 ‘사랑’을 저본으로 한 1963년 5월 삼중당 발행 ‘이광수전집 10’의 ‘사랑’과 거의 동일하다. ‘사랑’ (상)ㆍ(하) 초간본은 1938년 10월 박문서관에서, 연재소설이 아닌 전작소설로 간행되었다.
② 이 책에 표현된 어구 자체는 원문의 분위기를 살리도록 가급적 원문대로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표기는 현용 ‘한글맞춤법’에 준하였다.
③ 주는 ( ) 안에 "참"으로 표시하여 달았다. "참" 표시가 없는 ( ) 안의 주는 원문에 있는 주이다.
④ 삽화는 1968년 한국영화주식회사 제작, 강대진 감독 영화 ‘사랑’의 여러 장면을 내용에 알맞게 수록하여 독자들의 감상에 이바지하도록 하였다.

자 서(自序)

나는 사람이 평등되지 아니함을 믿는다. 지력으로나 의지력으로나 체력으로나 다 천차 만별이 있지마는 그 중에도 ‘옳은 것’, ‘아름다운 것’을 아는 힘, 느끼는 힘에 있어서 더욱 그러함을 믿는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슬퍼하지 아니한다. 도리어 사람의 이 차별이야말로, 무한한 향상과 진화를 약속하는 것이니, 벌레가 향상하기를 힘써 부처님이 될 수 있음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같이 더럽고 어리석은 중생도 부처님의 완전을 바라는 기쁜 희망으로 이 고달픈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들 중생 중에 때로 뛰어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본다. 석가여래라든가 여러 보살이라든가 예수라든가 하는 어른들이시다. 나는 그이들도 본래는 나와 같은 중생이셨더니라고 배울 때에, 너도 나와 같이 될 수 있느니라고 가르치심을 받을 때에 한량없는 고마움과 기쁨을 느낀다. 나는 가장 아름다운 몸과 가장 아름다운 음성과 가장 높은 지혜와 한량없는 사랑과 힘과 공덕을 가진 ‘사람’이 되어서 모든 중생의 사모함을 받고 그들에게 기쁨과 힘과 구원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 나는 대흥서원의 영원한 생명으로 중생의 사랑의 의지가 될 수 있음을 믿는다. 사람들아, 이에서 더한 희망이 또 있겠는가?
나는 이 모든 향상과 진화가 오직 우리가 짓는 업으로 되는 것을 믿는다. 고마우신 하나님은 이 우주가 인과율에 의하여 다스려지도록 지어 주셨다. 우리네 벌레와 같은 중생이 하는 조그만 ‘일’(업)도 하나도 스러짐이 없이 내 예금구좌에 기입이 되는 것이다. 이 저축들이 모이고 모여서 내일의 나, 내생의 나, 천겁 만겁 후의 나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야말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다. 만일 이 세상에 거름 준 벼가 거름 안 준 벼보다 못 되는 일도 있다고 하면 우리네가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들 것일까. 밥을 먹어도 배고픈 수도 있고 불을 때일수록 방이 더 추워 가는 일도 생긴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까?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온다는 것―이것이 어떻게나 고마우신 섭리자의 은혠가?
나는 사랑이 일체 유정물의 생명 현상 중에 가장 숭고한 것임을 믿는다. 그러나 똑같은 탄소로도 숯도 되고 석묵도 되는 반면에 금강석도 되는 모양으로, 다 같이 사랑이라 하더라도 천차 만별의 계단이 있고 품이 있는 것을 믿는다. 이성간의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음남 탕녀의 사랑과 현사 숙녀의 사랑과를 같이 볼 수 없는 것이니, 그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한 가치의 층등이 있는 것이다.
육체의 결합을 목적으로 하는 사랑이 가장 많겠지마는 그것은 마치 생물계에 사람보다도 벌레가 많다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육체의 결합과 아울러 정신에 대한 사모를 짝하는 사랑이야말로 비로소 인간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질 자격을 가지겠지마는 한층 더 올라가서 육체에 대한 욕망을 전연 떼어 버린 사랑이 있는 것이 인류의 자랑이 아닐 수가 없다. 그것은 일시적인 우리 육체 속에 있는 ‘영원한 존재’를 인식하는 데서만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다를 못 본 하백은 황하의 개천물을 세상에 가장 큰 물로 안다. 이러한 사랑을 보지 못한 사람은 육체를 안 보는 사랑을 공상으로만 생각하거니와, 그에게는 어느 때에나 한번 코페르니쿠스를 만나서 새 우주를 깨달아야 할 시기가 필요할 것이다.
사랑의 극치로 말하면 물론 무차별, 평등의 사랑일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의 사랑이다. 모든 중생을 다 애인같이, 외아들같이 사랑하는 사랑일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는 노중에는 어느 한 사람만이라도 육체를 떠나서 사랑하는 대목도 있을 것이다.
육체를 떠난다는 것은 동물적 본능을 떠난다는 말이다. 그 말은 ‘이기욕’을 일체로 떠난다는 말과도 같다. 완전히 ‘나를 위하여’라는 ‘욕심’을 떠나고 ‘오직 그를 위하여’ 사랑할 때에 그것이 비로소 ‘자비심’의 황금색을 띤 사랑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까지의 문학에는 원망이라든가, 질투라든가, 욕심이라든가, 미움이라든가, 성냄이라든가, 이러한 사나운 감정이 너무 많이 취급되고 강조되지 않았는가 한다. 이러한 추폭한 감정은 늘 사람에게 불행과 악을 주는 근본이 된다. 사랑이라는 부드러운 감정조차도, 많은 문학에서는 사나운 감정을 곁들이기를 좋아하였다. 이것은 대조라든가, 대중의 심리에 맞춘다든가 하는 문학적 기술의 편의를 위함도 있겠지마는, 역시 사람에게 있고 싶고 발달되고 싶은 것은 부드러운 감정일 것이다. 사랑, 동정, 기쁨, 슬픔 들, 들. 이러한 부드러운 감정만으로 문학적 작품을 만든 이가 과거에도 없지는 않았다. 불교의 여러 설화라든가, 근대에도 톨스토이의 말년의 단편 설화들은 그 예다.
사람은 저마다 제 오막살이 한 칸을 가지고 있는 모양으로 저마다 제 세계 하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오막살이들이 다 대견치 못한 것임과 같이 사람은 항상 제가 들어앉은 세계를 벗어나서 더 크고 넓은 세계를 찾아야만 한다.
‘끝없이 높은 사랑을 찾아 향상하라’는 애씀―독자여, 이것이 또한 아름다운 제목이 아닌가.
이것이 내 소설 ‘사랑’의 서문을 대신할 만한지는 독자 스스로 판단하시기 바 란다.
끝으로 한 말씀. 내가 쓴 모든 장편소설은 신문에 연재된 것이기 때문에 그날그날 한 회, 한 회씩 쓴 것이었고 또 신문연재물이라는 관념을 뗄 수가 없었다. 내 지금까지의 소설로서 끝까지 다 써 가지고, 또 연재물이라는 데 관련된 여러 가지 제한도 없이 써 가지고 세상에 발표하는 것은 이 ‘사랑’이 처음이요, 또 내 인생관을 솔직히 고백한 것도 이 소설이 처음이다. 이것은 ‘그의 자서전’ 이후의, 이를테면 내 최근의 작품이다. 다만 한되는 것은 이것을 한 일 년만이라도 더 묵혀서, 더 보고 더 생각하고 더 고쳐서 발간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만이라도 수정하기 전에 내어놓게 된 것이 양심에 매우 거북하다.

북한산(北漢山) 기슭에서
이광수(李光洙)

<해 설>

춘원의 ‘사랑’ 분석
김양호 <숭의여대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

Ⅰ. 서 언

문학작품은 당시대상의 반영이며 동시에 작가의 현실인식이 노정되어 있는 유기체적 존재이다. 정신의 역사가 당위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면 한 편의 문학작품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당시대상, 작가의 현실인식과 더불어 정신, 사상사적 맥락을 동시에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광수에 대한 평가는 정신사적 맥락을 무시한 검증이나, 부분을 전체로 파악하는 시각을 가지고서는 총체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부분과 전체, 부분과 부분, 전체와 부분 사이의 순환론적 해석과, 공시성과 통시성의 검증 및 당시대상과 작가의 현실인식, 역사 속에서의 친밀성과 이질성 등이 동시에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해석학은 하이데거의 선이해(Vorverst?ndnis)를 기반으로 한다. 인간이란 결코 자신과 순수하게 동일한 존재가 아니라 항상 자신에 앞서 미리 미래로 투사되는 존재이다.
가다머는 역사주의의 시간투시법과 작품 자체의 순환해석법에 의하여 해석학을 발전시켰다. 전자는 역사의 발전을 수긍하여 전승이 지니는 이질성과 동질성 사이의 간극을 해석하는 것이요, 후자는 작품 전체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하여 부분과 전체, 전체와 부분 사이의 순환론적 의미망을 추출하여 작품을 검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다양성의 통일을 위해서는 중간세계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부분과 전체, 전체와 부분 사이의 터미널 역할을 하는 중간세계의 설정 없이 통합적 해석론은 성립될 수 없다.
필자는 이러한 관점을 지니고 우선 ‘사랑’을 분석하기에 앞서 동작품의 지배소, 즉 중간세계의 위치를 설정하여 다양성의 통일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고구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지적한다면 이광수(李光洙)의 ‘사랑’에서 중간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은 <사랑>이며 그 <사랑>은 <인정(人情)>이 변형 발전된 양태라는 가설을 내세우고자 한다.
본고의 진행은 이러한 가설을 검증하는 연역적 구조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 가설에 타당성이 주어진다면 그 점을 이광수 전체의 문학에 확대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며, 바로 그곳에 의의가 주어지리라고 본다.

Ⅱ. 긍정과 부정적 평가의 대립

‘사랑’은 발표 당시 임화, 김남천 등 당대의 마르크스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은 작품이다. 사실감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의 비평가 중 김문집만이 ‘사랑’을 극찬하면서 동작품이 성격소설이 아니라 테마소설임을 지적했다.
김동석은 춘원의 문학이 위선자의 문학이라고 지적하였다. 반면 김팔봉은 ‘사랑’이 기독교 사상과 불교사상이 혼연히 융합된 것이며 ‘수성(獸性)’의 사랑을 ‘신성(神性)’의 사랑의 차원으로 이끌어 올린 작품으로 평가한다.
김붕구와 윤홍로는 ‘사랑’이 시각형(視角型) 인물군으로 결집되어 있으며 역사의 발전에 대한 시각을 결여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조연현은 이성애를 모성애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 작품으로 보고 ‘애정의 이상주의가 가장 강렬히 주장된 일극단을 보여 준 작품’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후의 평가 중에서는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구조로 ‘사랑’의 등장인물을 분석한 신상철의 소론이 있다. 신상철은 ‘사랑’과 ‘적과 흑’을 비교 분석하면서 줄리앙 소렐의 욕망이 부정적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반면 석순옥과 안빈의 사랑이 긍정적으로 해소되는 것은 바로 작자인 춘원의 개인적 욕망이 줄리앙 소렐처럼 야망과 허영이 아닌 까닭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 최정석은 ‘사랑’의 주인공을 순옥으로 보고 그곳에 나타난 사랑을 ‘춘향전’의 춘향과 비교하여 불교적 관점에서 살펴본 후, 춘향의 사랑이 개아적(個我的)인 ‘소아적(小我的)’ 사랑이었다면 순옥의 사랑은 무아적(無我的)인 ‘대아적(大我的)’ 사랑이었다고 구별했다.
이상으로 개관한 ‘사랑’의 연구사는 ‘사랑’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Ⅲ. 중간세계로서의 인정

나는 나의 부족한 몸의 힘과 마음이 허하는 대로 조선 역사의 축도요, 조선인 성격의 산 그림인 단종대왕 사건을 그려 보려 한다. 이 사실에 드러난 인정과 의리―그렇다. 인정과 의리는 이 사실의 중심이다―는 세월이 지나고 시대가 변화한다고 낡아질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단종애사’ 밑줄 필자)

1928년 ‘단종애사’를 쓰면서 토로한 자작(自作)의 변(辯)이다.
인정을 숭상하는 춘원 자신의 성격은 이러한 자작의 변이 아니라도 처처에서 나타난다. ‘이차돈의 사’에서는 “비록 1천 4백년 전의 사람인 이차돈, 월주, 성주 등의 인물을 그리지마는 그 속에 흐르는 인정을 중시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혁명가의 아내’에 대해서 신여성지와 인터뷰하는 도중에 동작품은 혁명가를 학대하는 아내의 몰인정한 행동에 묘사의 초점을 두었다고 강조하면서, 두 번 다시 그런 아내의 몰인정함이 없기를 바라는 뜻에서 쓴 작품이라고 토로하고 있다.
또한 ‘유정(有情)’과 ‘가실(嘉實)’은 인정의 아름다움을 그리기 위해서 썼다고 강조하고, 까닭에 당시까지 쓴 자신의 작품 중(1937년) “후세에 가히 끼쳐질 만한 것은 ‘유정’과 ‘가실’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세태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인정뿐이라고 생각한 춘원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인정은 불변할 것이라고 보았다.

인류문화라는 것은 지구상에서만도 몇 백만 회의 생멸이 있었다……(약) 그러하더라도 인류는 불변할 것이다……(약) 여기에 인정을 응시하고 완미(玩味)하고 있는 예술가의 영원성이 있는 것이다. (‘사랑’)

춘원이 인식하고 있는 인정과 사랑은 어느 곳에 쓰이든지 서로 환치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점을 주목해야만 할 것이다.
필자는 그 점을 좀 더 세밀히 고구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하고자 한다. 즉 첫째, 춘원 자신의 심성(心性), 둘째, 동학사상의 영향, 셋째, 도산 안창호의 영향, 넷째, 기독교 및 톨스토이의 영향, 다섯째, 불교의 영향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춘원 자신의 심성을 생각해 보면 춘원은 원래 다감한 인정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어린 시절 부친의 죽음을 목도하고 “내가 의원이 되면 어떤 사람이 부르더라도 반드시 달려가리라 울고 맹서한 사실” 에서도 그런 인성을 엿볼 수 있겠다. 또한 시베리아 방랑 시절 이극로에게 단벌 외투를 벗어 준 사실, 50대에 이르러서도 딸 정화에게 인정과 자비심이 많다고 칭찬해 주곤 했다는 사실, 원고료를 받으면 그것을 쪼개어 어려운 친구들을 도와주곤 했다는 사실, 비단옷을 훔치려 한 식모의 죄를 감싸 준 사실, 문전에 거지가 오면 항시 맞아들여 대접한 사실 등 인정 많은 춘원의 생애에 얽힌 일화는 많이 나타난다.
둘째, 동학사상의 영향이다.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평등주의는 그의 작품 ‘거룩한 이의 죽음’에서 나타나 있듯이 숭고한 인격과 인정으로 구현되고 있다. <인내천>과 평등사상의 기저에 흐르고 있는 것은 인정과 사랑이다.
셋째, 도산 안창호와 흥사단의 영향이다, 도산을 존경하여 “평생에 조선 사람으로 존경하는 사람은 이순신과 안창호뿐”이라고 토로한 춘원은 흥사단의 설립 취지에 공명하여 입단 1호가 되었다.
“도산은 인류에게 가장 귀한 것이 인정이라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가 흥사단 입단 문답을 할 때에는 약법 중에 정의돈수(情誼敦修)라는 문구를 들여서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문답받는 이의 자각을 환기하기에 노력하였다.”는 춘원 자신의 회상도 그러하지만 도산이 인정 많았던 사람이었으며 또 인정이 인간의 심성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라고 믿고 실천하려 했음은 여러 모로 실증된다.
넷째, 기독교 및 톨스토이의 영향이다. 춘원 자신 17세의 나이에 동창생인 야마자키 도시오(山崎俊夫)에게서 빌려 읽은 톨스토이의 ‘부활’에 대해서 강한 충격을 받았다는 고백을 하고 있거니와 자신이 추천하고 싶은 소설선에서도 이 작품을 두 번째로 거론하고 있다. 또한 “톨스토이는 지구가 산출한 가장 큰 사람 중의 하나”라고 인식한 춘원은 그의 인도주의정신과 박애정신을 높이 평가했으며 본받기 위해서 힘썼다. 또한 ‘레미제라블’을 쓴 위고가 조선에서 충분히 평가되지 못함을 지적하면서 톨스토이와 함께 비교하기도 했다.
다섯째, 불교의 영향이다.
1934년 차남 봉근(鳳根)의 죽음 이후 격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던 춘원이 구도(救道)의 길로 접한 것은 불교사상이었다.

나는 그 후에 새 아내에게서 난 아들 하나를 끔찍이 사랑하다가 잃어버렸다. 그리고는 피눈물이 나도록 가슴이 아팠다. 만일 인연으로 태어나는 것이라면 그 어린애가 내게 대한 미진한 인연을 풀기 위하여, 또 나로 하여금 자식 죽은 슬픔을 가르치기 위하여서는 인정 없는 악한 버릇을 징계하기 위하여 다녀간 것인지도 모른다.(‘그의 자서전’, 밑줄 필자)

아들의 죽음(1934) 이후 삶에 대한 회의를 느낀 춘원은 도산의 장기 투옥(1935)에 대한 충격과 조선일보의 퇴사(1934) 등의 여파로 입산을 결심하고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아내의 간청으로 하산하기도 했다. 이후 춘원은 세검정에 집을 짓고 집필에만 몰두한다. ‘법화경(法華經)’의 번역에 착수한 것은 이듬해(1935)이며 ‘이차돈의 사(死)’(1936), ‘무명(無明)’(1937) 등 불교사상이 담긴 작품을 발표하면서 ‘사랑’(1939)을 집필했다.
이상으로 춘원의 다난한 삶의 도정에서 추출된 인정의 흐름을 개관하여 보았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춘원 자신의 심성이나 동학, 도산사상, 기독교와 톨스토이즘, 불교사상 등이 외연적인 양상에서는 춘원의 삶의 순차적 진행에 따라 일견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기실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전술한 사상적 맥락은 모두 춘원 자신의 심성에 투영, 굴절되면서 수용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그 사상의 중심점에는 인정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 인정을 중심으로 하여 제반 사상들이 역동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부단히 순환하고 있다. 이 점을 도표화해 보면 <표1>과 같다.

<표 1>과 같은 도표에서 드러나듯이 춘원의 심성은 인정(사랑)을 구심점으로 하여 사상적 변화를 관류하면서 부단히 상호유기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문제는 사상의 종적개념(種的槪念)이 아니라 질적개념(質的槪念)이다. 어떠한 사상이든지간에 인정(사랑)을 고양시키는 것이면 춘원은 수용했던 까닭이다. 이러한 사상적 다기성(多枝性)이 일견하여 다양성의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춘원이 이루려 한 통일의 세계가 종교의 세계가 아니라 인정(사랑)의 세계라는 점에 유념한 다면 그러한 비판은 지양되어야 하리라 본다.
인정(사랑)은 춘원의 심성을 통괄하여 흘렀던 지배소라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춘원 자신이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외계로 보내는 메시지이며, 외계와의 대화를 위한 중간세계 구실을 하는 개념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 중간세계인 인정은 제반 사상과의 상호유기적 연관성을 띠고 당위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렇다고 해서 외면에서 영향을 준 공시적 사상만이 춘원의 인정 속에 굴절되어 수용된 것은 아니다. 그 점은 춘원 자신이 지향하는 인도주의사상이 톨스토이뿐만 아니라 조선의 사상을 오랫동안 지배해 오던 중국사상 가운데 포함된 인도주의에서도 영향받았다고 토로하는 고백에서도 엿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춘원 자신의 현실인식이다.
춘원은 자신의 문학관을 토로하면서 어느 시대에나 당시대를 지배하는 시대정신이 있다는 괴테의 말을 인용하고 나서, 그렇지만 시대정신은 영구성이 없다는 한계를 지적했다.
그렇다면 춘원 자신이 생각했던 인생의 주류는 무엇안가? 그것은 시대정신과 당시대상을 뛰어넘을 수 있는 그 무엇,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살아남아 사람을 감동시키고 인격을 고양시켜서 인류의 삶에 도움이 되는 정신일 것이다.
앞서 고구한 바와 같이 그것은 인정(사랑)을 제외하고는 없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의도로 ‘사랑’은 쓰인 것이다. 춘원의 문학이 개념적, 계몽적, 도식적이라는 비판은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조금은 완화되리라고 본다. 당위의 세계, 완전태(完全態, Entelechie)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사실 자체가 도식성의 한계를 지닐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유물론자들의 사회결정론이 좋은 예이다.

Ⅳ. 인류애로의 지향

‘사랑’의 주인공은 석순옥(石筍玉)이다. 플롯의 구조 또한 석순옥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순옥이 사랑의 의미를 완전태의 차원으로까지 실천하려고 하는 과정이 바로 ‘사랑’의 중심 골격이라고 하겠다. 이 과정이 ‘사랑’의 중심핵이 되어 부수인물군들의 구조와 부단한 교호작용을 견지하고 있다. 순환론의 관점에서 석순옥이 추구하는 과정을 전체라고 설명한다면 기타 인원이나 허영, 한씨부인, 이 의사 등은 모두 동일한 구조의 부분으로 작용하고 있다. 전체와 부분은 상호간에 유기적으로 결합 발전, 순환하면서 완전태의 추구를 지향하고 있다.
필자는 앞 절에서 인정(사랑)이 <사랑>의 중심이요 춘원의 지배소라는 가설을 제기하고 검증한 바 있다. 따라서 본 절에서 이루어질 <사랑>의 구체적 분석은 ‘사랑’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또한 Ⅱ절의 말미에서 제기한 바와 같이 작품 ‘사랑’ 중에서 춘원이 내세운 <사랑>의 실체는 무엇이었으며, 그것은 리얼리티를 지니고 있는가, 또 작자가 <사랑>을 통해서 제시한 것은 무엇이었으며 그 목적은 무엇인가가 규명된다면 <사랑>의 전체 의미망은 검증될 수 있으리라 본다.
‘사랑’에 등장하는 인물군은 모두가 사랑에 대한 욕구와 적대자에 대한 미움을 강렬히 지니고 있다. 동작품에 나타난 중심구조를 도식화해 보면 다음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사랑’ 속에 등장하는 인물군은 ① 주체에서 출발하여, ④ 완전태의 사랑을 지향한다. 즉 개인적인 이기적 사랑에서 출발하여 대아(大我)의 이타적 사랑에 이르는 길을 추구한다고 하겠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② 친애자(親愛者)를 통하여 사랑을 배워서, ③ 적대자(敵對者)까지 사랑함으로써, ④ 완전한 사랑의 형태에 이르는 경로를 지향하고 있다.
이 구조가 ‘사랑’의 중심구조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필자는 작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즉 인류애(人類愛)로의 지향이다.
먼저 석순옥의 경우를 보자면, 순옥이 친애하는 사람은 안빈이며, 안빈을 통해서 적대자인 허영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리고 허영을 사랑함으로써 완전태의 사랑으로 이르는 것이다. 즉 다음과 같은 구조이다.
<표 3>에서 볼 수 있듯이 순옥은 자신의 친애자인 안빈을 통해서 안타고니스트인 허영과 한씨 부인, 귀득을 용서하고 이해하는 차원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역삼각형의 구조와 같이 사랑의 폭을 넓혀 가는 것이다. 그리고 적대자를 사랑함으로써 인류애의 지평에 이른다. 그 인류애의 지평이 순옥의 지향점이며 작자의 의도이다.
이 점은 ‘사랑’ 속에 등장하는 긍정적 인물군에는 모두 동일하다. 안빈의 아내 옥남은 안빈을 통해 연적이었던 순옥의 마음을 이해하며, 인원은 순옥을 통해서 안빈을 존경할 수 있게 된다. 만주의 이 의사도 마찬가지로 순옥을 통해 미워하던 부인을 맞아들이고 안빈의 병원까지 오게 된다.
그러나 ‘사랑’에 등장하는 부정적 인물군은 친애자의 단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안타고니스트까지 사랑하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출발점과 친애자의 사이에서만 부단히 방황한다. 때로는 적대자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사랑의 차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혹은 출발점에 머무는 이기적 인물로 고착되고 만다. 그 점은 다음 <표 4>와 같이 도표화할 수 있겠다.
부정적 인물군
<표 4>에서 알 수 있듯이 허영은 순옥을 통해서 안빈을 존경하려는 차원까지 이를 때도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사랑은 아니다. 허영이 안빈에게 감동했던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순옥과 자신의 결혼을 안빈이 수락했다는 관점에서이다. 즉 이기적인 심정의 소산이다. 따라서 상황이 바뀌면 그 사랑이 다시 안빈에 대한 증오로 나타나는 것은 필연이다.
한씨 부인도 마찬가지이다. 외아들인 허영을 통해서 미워하던 순옥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 같은 차원에 도달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순옥이가 허영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는 이기적인 감정일 뿐이다. 따라서 자신의 이기심이 충족되지 않을 때 한씨 부인은 순옥을 저주하며 죽을 수밖에 없다.
위와 같은 구조에서 검증해 낼 수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긍정적 인물군은 이타적 사랑을, 부정적 인물군은 이기적 사랑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주목할 점은 인물이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작품 속에 등장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인물로 퇴장했는가 하는 점이다. 긍정적 인물로 등장한 사람이 부정적 인물로 퇴장한 경우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정적 인물이 긍정적으로 퇴장하는 경우도 있다. 전자는 귀득을 들 수 있으며, 후자는 이 의사의 경우이다.
이러한 인물 설정은 춘원 자신의 사랑관의 반영이다. 즉 “내 인생관을 솔직히 고백한 것은 이 소설이 처음”이라고 쓴 ‘사랑’ 자서(自序)에서 춘원은 다음과 같이 그의 인생관(사랑관)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의 극치로. 말하면, 물론 무차별, 평등의 사랑일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의 사랑이다. 모든 중생을 다 애인같이, 외아들같이 사랑하는 사랑일 것이다……(약)……
육체를 떠난다는 것은 동물적 본능을 떠난다는 말이다. 그 말은 ‘이기욕’을 일체로 떠난다는 말과도 같다. 완전히 ‘나를 위하여’라는 ‘욕심’을 떠나고 ‘오직 그를 위하여’ 사랑할 때에 그것이 비로소 ‘자비심’의 황금색을 띤 사랑이 되는 것이다. (‘사랑’)

이기심을 버리고 <오직 그를 위한> 사랑을 하기 시작할 때에 <자비심>의 황금색을 띤 사랑이 된다는 고백이다. 여기서 인용한 황금색을 띤 사랑은 바로 ‘사랑’ 속에 나타나는 <아우라몬>의 사랑이다. <아우라몬>은 <아우라스>라는 뜻, 즉 금을 나타내는 라틴어에서 만들어 낸 말로서 황금소(黃金素)라는 뜻이다. 춘원은 황금색을 띨 수 있는 <아우라몬>의 사랑은 자비심을 지닌 것으로 보고 있다. 바로 ‘사랑’의 중심구조를 이루는 <표 2>에서 완전태에 이르는 사랑이다.
이상에서 검증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춘원은 사랑의 완전한 형태를 제시하고자 하였으며, 그 형태는 결코 이기적 사랑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그 점은 긍정적 인물로 등장하는 사람들이 <안빈 =안빈낙도>, <순옥=순수한 옥>, <옥남=옥으로 만든 억척스러운 남(男)> 등으로 유추될 수 있는 반면 부정적 인물군은 <허영=허영(虛榮)>, <배은희=배은희(背恩姬)>, <김광인=김광인(金狂人) 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에서도 동일하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고구되어야 할 것은 과연 춘원이 ‘사랑’을 통해서 무엇을 제시했으며, 그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사랑’을 통해서 제시하려 했던 것이 완전태의 세계라는 점은 명확한 일이다.
그 점은 Ⅳ절의 서두에 제시한 <표 2>의 형태에서 검증할 수 있으리라 본다. 즉 순옥은 안빈을 통해서 진정한 <아우라몬>의 사랑을 실천할 힘을 얻는다. 그럼으로써 긍정적 인물군, 즉 인원과 옥남, 이의사 등을 적대자까지 사랑할 수 있는 차원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 말은 바꾸어 생각하면 안빈의 사랑관이 결국 옥남, 이 의사에게까지 미쳤다는 것과 같다. 이후 인원과 이 의사 등에 의해서 이 사랑의 힘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더 폭이 넓게 뻗어나가 궁극적으로는 만인의 심성을 고양시키는 결과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회원자론적 관점>으로서 각 개인의 발달을 통해서 전체 사회의 발전을 이룩한다는 견해라고 하겠다. 따라서 이렇게 본다면 작자인 춘원이 제시하는 <사랑>의 목적은 바로 이 사회원자론적 관점과 부합되는 것이며 그곳에 바로 인정(사랑)을 지배소로 한 ‘사랑’의 의미망이 설정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 점은 바로 한 사회에 대한 경종의 의미로 던져지는 <사랑>의 의미이며 타락해 가는 심성에 대한 극복의지로서의 던지는 춘원의 메시지이다. 그런 까닭에 ‘사랑’이 바로 사회원자론적 관점에 반대하는 유물론자들의 강렬한 비판을 받았던 것이며, 춘원 자신 또한 결코 유물사관을 수긍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유물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사회유기체론>, 부언하자면 개인은 사회 전체의 구조적 변화를 통해서만 변화한다는 이론으로서 사회원자론적 관점과 정반대의 입장이다. 어느 편이건 일면만을 집착한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한계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역사는 항상 이 두 가지 관점을 지닌 채 상향적으로 변증법적인 발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V. 결 어

이상으로 ‘사랑’에 나타난 <사랑>을 분석해 보았다. 여기에서 드러난 사실들을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사랑’의 지배소로서의 인정(사랑)은 보다 더 많은 대중을 위해 작품을 쓰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대중적 범인(凡人)들에게 가장 근접한 사랑의 양태일 수 있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기능될 수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둘째, 사회원자론적 관점에 치중된 춘원의 관점은 나름대로 한계성을 지닐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역사의식의 결여라는 점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 점은 춘원의 역사관이 역사 및 사회구조에 의해서 영향받는 인간의 환경적 지배요인에 대해 탐구하지 못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김붕구가 춘원을 시각형(視角型) 인물이라고 비판한 것은 이런 관점이 아닌가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필자는 역사 및 사회구조에 의해 일개인의 삶이 규정된다는 결정론적 견해를 지지하지는 않는다. 부연하자면 필자의 소론은 일면적으로 개인, 또는 인간의 자발적 의지에 의한 세계의 변화도 인정하지만, 동시에 역사적ㆍ사회적ㆍ환경적 요인에 의해서 제약받는 개인의 의식구조와 사회의 하부구조에 의해 영향받는 삶의 양태 또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당시의 현실에서 극단적으로 상반된 견해를 취하고 있던 두 진영의 어느 편이나 부분적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아야 함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런 까닭에 춘원 또한 그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나름대로의 한계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으리라 본다.
세번째 점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 없다고 본다. 다만 한 가지 사랑의 본질을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에서 춘원의 작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여지를 남긴다.
진리의 본질적 의미는, 또는 완전한 진리는 인간에게 그 전체로서 알려지기 힘든 것이며 (아니 불가능일지도 모른다) 항상 일면적ㆍ간접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넷째, ‘사랑’에 제시된 <사랑>은 결코 현실을 떠난 도피가 아니라, 부분과 부분의 역동적 순환을 통한 점증적 발전으로 현실 극복을 위해서 제시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만 한다. 순옥과 안빈의 사랑만이 서로 역동적인 발전을 통해서 완전태로 이르는 길을 지향한다는 사실이 그 점을 입증한다. 그것은 개인의 인격 향상을 통해서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사회원자론적 관점이다. 물론 이 관점이 일면만을 강조한 역사의식이 결여라는 점에서 비판받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완전태의 지향을 위해 제시된 <사랑>까지 비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관점의 차이이다.
이상으로 본고에서 고구된 주요 논점들을 정리해 보았다.
결국 춘원이 내세운 사랑의 의미는 인정의 변형이었으며 나름대로의 리얼리티를 획득한 현실극복의 시도였다. 이것은 춘원의 ‘사랑’을 관류한 지배소였으며, 춘원 자신이 당시 사회에 대한 극복의지와 인간의 향상, 인류애에의 지향을 위해 제시한 메시지였다.
그러나 ‘사랑’의 결정적 한계점은 사회, 역사의 발전방향을 오직 한쪽의 시점, 즉 사회원자론적인 점진주의적 낙관주의의 관점에서만 보았다는 점이다. 사회와 역사는 사회원자론과 사회유기체론을 동시에 병행하면서 발전한다. 그것은 부분과 전체의 상호변증법적인 발전이라고 환치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ㆍ역사의 발전을 편중된 사회관ㆍ역사관으로만 보았다는 점이 ‘사랑’의 한계점이다. “한문으로 쓰인 구운몽(九雲夢)은 우리 문학이 아니다.”라는 춘원의 주장은 그런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또한 전혀 상이한 <창조론>과 <진화론>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곳에 있다고 하겠다. 나아가서는 ‘사랑’을 쓴 직후의 결정적 친일행위도 그 측면에서 설명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러한 사관의 차이 때문에 사회주의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았던 것이라고 하겠다.


목차


자서 / 3
<상권> 사모하는 이의 곁으로 / 8 박사 안빈 / 32 사랑이 비칠 때 / 70 쌍곡선 / 113
인연의 길 / 150 죽음의 저쪽 / 202
<하권> 떠나는 길 / 222 첫날밤 / 256 수 난 / 305 사랑의 길 / 346 사랑에는 한이 없다 / 394
<해설> 춘원의 ‘사랑’ 분석 : 김양호 / 442 ‘사랑’ 관계 연구 논문 / 452
이광수 선생 약력 / 454 강대진 감독 약력 / 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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