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 지원’ 사업 선정작인 장정희의 장편소설 『옥봉』은 천부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생을 살다 간 조선 중기 시인 이옥봉의 이야기이다. 조선 시대 대표적 여성 시인인 허난설헌, 황진이, 이옥봉. 그들은 모두 주옥같은 시를 남겼지만, 정작 그들 내밀한 사적 생애의 자취는 하나같이 안개 저편에 흐릿하게 가려져 있다. 가혹한 가부장제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이옥봉의 천부적 재능은 차라리 저주받은 축복이자 형벌이었다. 서녀로 태어나 소실의 신분으로 살아야 했던 옥봉은 결국 자신이 쓴 한 편의 시로 인하여 사랑하는 남편에게서조차 버림받은 채 홀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반상(班常)과 남녀의 구분이 엄혹한 조선 시대. 선조 때 옥천 군수를 역임했던 이봉의 서녀로 태어난 옥봉은 어려서부터 시 짓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자신의 이름을 옥봉(玉峰)이라 스스로 짓고, 학식과 인품이 뛰어난 남자의 소실로 들어가 살겠다고 결심한 여인. 일찍이 중국과 일본에서 천재성을 인정받았을 만큼 옥봉은 뛰어난 재능과 단단한 심지를 갖춘 인물이지만, 여자의 목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안 된다고 믿는 시대에 그녀의 재능은 발목을 옥죄는 도리어 커다란 족쇄가 됐다.
시재가 뛰어남을 이미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옥봉은 조원의 소실로 들어가 사는 조건으로 ‘함부로 글을 쓰지 않겠다’고 약조해야만 했다. 그러나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이웃을 차마 외면하지 못해 대신 소장을 써주고, 약조를 어겼다는 이유로 옥봉은 임란 직전 남편으로부터 내쳐졌다. 그 이후 종적이 묘연해져 어떻게 살다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조차 알려진 바가 없다.
당신들은 내게 시를 ‘재앙’이라 말하지만, 그건 틀린 말입니다. 내게 시는 오로지 나의 존재 증명이자 여자로서, 서녀로서, 소실로서 살아야 했던 내 생의 전부를 내건 발언이고 항변이고 싸움이었던 거지요.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이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가 그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임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지요. 그런데도 내 시가 그토록 불경했단 말입니까? 시를 짓는 일이 그토록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왜? 왜? 내가 여자라서요? 아니면 서녀라서요? 그것도 아니라면 소실이라서요? 그랬기에 시 짓는 일 따위는 하지 말았어야 했단 말입니까? _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