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실천문학 신인상에 단편소설 「여보세요」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채영신의 첫번째 소설집. 『소풍』에 수록된 여섯 편의 작품은 대개 폐쇄된 공간을 배경으로 하며, 보통의 상상력으로는 쉽게 가닿을 수 없는 극단의 지점을 향해 나아간다.
서로에게 아빠를 죽였을지 모른다는 의혹의 칼날을 겨누는 가족(「소풍」)과 아내를 칼로 자르는 남편(「4인용 식탁」), 고양이의 항문을 순간접착제로 막아 박제하는 여인(「나는 이야기다」), 어린아이를 송곳으로 깊숙이 찌르는 엄마(「맘스터」), 중증 장애인이 음부를 벌리고 돈을 버는 사무실(「여보세요」)이 있는 괴기스럽고 참혹한 고통의 현장. 무간지옥(無間地獄)을 살아가는 채영신 소설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통에 대해 독특한 반응을 보여주는데, 이른바 ‘사디즘(sadism)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때의 사디즘은 자신을 완전히 비워서 사회의 논리나 시스템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이 ‘나’를 극단으로 몰아붙일 때, 「맘스터」의 엄마는 죽어가는 아들의 목을 조르고 다른 집 아이를 납치한다. 엄마를 괴물로 만든 세상의 시스템은 납치한 아이에게 가해지는 폭력으로 증폭되어 되풀이된다. 레스토랑 유리 부스 안에 갇혀 야릇한 행동을 해보라는 주문을 받으며 살아가는 「나는 이야기다」의 ‘나’는 세상이 자신을 유리 부스 안에 가두었듯이, 멀쩡한 고양이를 병에 가두어 박제하려 한다. 세상의 비정한 논리가 연약한 새끼 고양이에게 그대로 미메시스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괴물로 만든 사회의 폭력을 그대로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순간, 이들의 자아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4인용 식탁」 역시 죽음을 통해서만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작가의 비관적 세계 인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따뜻한 밥상을 받고 자라지 못”한 그는 마찬가지로 “빈한한 식탁에 대한 부끄러움”을 가슴 깊이 간직해온 아내와 함께 소외된 삶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으나,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이 그토록 떠나고 싶어 했던 단절과 소외의 세계로 귀환했다는 것을 안다. 그가 열심히 자르고 있는 식탁은 다름 아닌 아내의 몸이었음이 마지막에 드러나는데, 그것은 아내가 가장 좋아하던 나무로 아내를 환원시키는 일이다. 단절과 소외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적 조건이라면,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죽음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인간은 바로 그 존귀한 단독자적 생명으로 인하여 고독이라는 불치의 질병을 안고 살 수밖에 없다. “나무가 이제 그만 숲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 그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을, 평생이란 시간을 이 집에서 혼자 견딜 자신이 없겠지, 너도”라는 대목이 숙명적 조건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인간의 의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읽히는 이유이다. 그러하기에 이 작품에 드러난 그의 광기는 한 개인의 광기인 동시에 문명의 광기이고, 나아가 모든 인간의 광기이기도 하다.
「말의 미소」는 중편 분량에 걸맞게 삶의 주름이 좀 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나’가 겪는 고통은 인간 사이의 이해 불능에서 비롯된다. 대학 시절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혜승과 나는 분명한 이유도 없이 서로 만나지 않고 있다. 소설 쓰기의 문제는 인간 이해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혜승에게 나를 온전히 이해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소설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것도 ‘나’에게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내가 당신을 다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마. 내가 당신을 속속들이 이해했다면 당신은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 두려움에 대해서 써봐, 부디 용기를 내서”라고 말하는 남편 역시 부부 사이에서도 이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나’가 소설을 쓰는 이유도 바로 그 이해 불가능에서 오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말의 미소」에는 크리스 도네르의 동화 『말의 미소』(김경온 옮김, 비룡소, 1997)가 겹텍스트로 놓여 있다. 동전까지 탈탈 털어 모은 돈으로 『말의 미소』의 선생님과 아이들은 비르 아켕이라는 말을 산다. 비르 아켕은 아이들에게 미소를 짓고, 그 미소는 “아이들에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 웃음은 고통 때문에 얼굴을 찡그린 것에 불과하다. 말이 윗입술을 콧구멍 위까지 들어올릴 때는, 기쁨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배가 몹시 아프기 때문에 그러는 것일 뿐이다. 아이들이나 선생님은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없었다. 이러한 이해와 소통의 어려움, 나아가 불가능성이 동화 『말의 미소』에는 담겨 있으며, 이러한 주제는 채영신의 소설 「말의 미소」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말의 미소」는 이번 소설집에 실린 작품에서 유일하게 희망의 작은 틈을 보여주며 끝난다. ‘나’는 오래전 혜승을 무작정 여섯 시간이나 기다리다 끝내 만났던 일을 떠올린다. 혜승은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그저 반갑게 웃으며 달려왔고, ‘나’도 혜승에게 짜증을 내거나 추궁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처럼 굳게 믿고 기다리면 “혜승은 아무렇지 않게 나를 향해 달려올 거야”라고 생각한다.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것만이 인간 사이의 유대를 가능케 한다는 역설이 탄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기에 너그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역설의 윤리야말로 웃음을 잃어버린 말에게 웃음을 돌려주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설의 윤리는 무간지옥에 버금가는 날것의 고통과 자아를 무화시키는 사디즘적 주체를 거쳐온 것이기에 더욱 믿음직하다. 채영신은 근원적인 언어를 통하여 현실과 인간의 가장 어둡고도 무시무시한 차원을 형상화하는 데 일가를 이룬 독보적인 작가이다. 우리가 채영신의 소설을 기다린다면, 아마도 그 이유는 그녀의 고유성이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 인간과 문명 일반의 보편성과 맞닿아 있는 진경을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 『소풍』은 그러한 기대가 결코 무모하지 않은 것임을 증명하는 아름다운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