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한글 연구와 국어운동에 전념하며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과 사전 편찬 사업에 앞장선 정태진
정태진은 1921년 함흥 영생여학교에 영어 교원으로 일하다가 미국 유학길에 올라 우스터대학에서 철학으로 문학사 학위를 받고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한 뒤 콜롬비아대학 교육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6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와 다시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무주임을 맡았다.
정태진은 영생에 근무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글을 연구하면서 학생들과 함께 방언을 수집·연구하였다. 1941년 6월 정태진은 열과 성을 다했던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를 떠나 조선어학회 사전편찬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방언 조사를 하는 등 한글에 관심을 가졌던 그였기에 조선어학회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가 근무한 조선어연구회는 규약에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 연구, 매월 한 차례 연구발표회를 열고 때를 따라 강연회와 강습회를 연다’고 명시하였다. 한글 연구와 한글 보급을 가장 주요한 목표로 삼았다. 이 연구회는 후일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꾼, 우리나라 민간 학술단체의 시작이었다.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1월 10일에 제11회 정기총회를 열고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개명 이후 첫째 한글 맞춤법 통일안 마련, 둘째 조선어 표준말 사정(방언 정리)과 공표, 셋째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제정, 넷째 한글 강습회 개최, 다섯째 한글 창제 반포일(한글날) 기념식 개최, 여섯째 기관지 『한글』 발간, 일곱째 조선어사전(큰사전) 편찬 사업, 여덟째 ‘조선기념도서 출판관’ 결성 등을 목표로 하였다.
정태진은 조선어연구회에서 ‘조선 어문의 연구와 통일’과 이를 대중에게 보급하려고 전개한 사업을 펼치며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과 사전 편찬 사업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1942년 홍원경찰서에 잡혀가 조선어학회가 치안유지법 제1조의 ‘국체를 변혁할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 곧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라는 명목하에 수감 생활을 겪고 나왔다.
정태진은 뜻하지 않은 사고로 그가 간절히 바라던 『큰사전』의 완간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곤궁한 생활에서도 한결같이 한글 연구와 국어운동에 전념하고 우리말 건설에 전념을 다한 진정한 국어학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