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찬히 들여다보면 크든 작든 굴곡이 없는 삶은 없다. 진보사학의 주류는 그 굴곡을 억지로 펴서 직선으로 곧게 뻗은 진보의 이야기를 만드는 데 열심이었다. 뤼트케의 일상사는 계몽 좌파의 오만을 버리고 보통사람들의 일상에 낮은 포복으로 접근한다. 그리고는 굴곡진 삶의 주름들 사이에 빼곡히 숨어 있는 기억, 감정, 고자질, 아집, 전쟁하기, 휴식, 권위, 충성 등등의 모순을 부조리하게 드러낸다. 우리네 삶이 껴안고 있는 여러 세상을 보게 해준 뤼트케에게 건배! ―임지현(서강대학교 교수)
역사에서 일상을 탐구한다는 것은 그 주체가 자기를 둘러싼 세계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묻는 것이며, 그가 얽힌 세상에서 그를 가위로 오려내지 않겠다는 의지다. 민중의 일상은 보통 파편으로 남아 있다. 작은 조각이 무수히 떠도는 검은 바다. 어떤 질문을 던져야 그들의 세상이 저마다 빛을 내며 모습을 드러낼까? 먼저 이 검은 해변에 섰던 알프 뤼트케가 이렇게 다독인다. ‘타자를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그들은 우리에게 더 낯설게 보이지.’ 어찌 뤼트케와 함께 일상의 바다를 표류해보지 않겠는가. ―정병욱(고려대학교 교수)
대문자 역사의 큰 길을 벗어나 역사의 샛길들에서 인간을 탐구한
일상사 연구의 대가, 알프 뤼트케
이 책은 1980년대부터 대표적인 독일 일상사가로서 역사학계에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알프 뤼트케(1943~2019)를 기억하며, 그의 논문을 선별하여 모은 것이다. 알프 뤼트케는 1970년대 이후부터 아래로부터의 역사, 노동자 역사, 20세기 독재와 국가폭력, 물리적 폭력, 기억과 과거사 청산, 역사 속 사진과 그림, 감정 등을 연구하면서 권력에 비판적인 여러 행위를 분석하고 이를 일상사로 지칭하면서 역사학의 방법론과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의 연구 성과는 한국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아서 그의 연구가 자주 소개되었고, 글도 일부 번역되었다. 그러나 늘 일상사에 대한 이론적인 접근을 넘어서 일상사를 서술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다가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컸다.
비록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를 기억하는 한국의 연구자들이 힘을 모아 펴낸 이 책은 독일사를 바탕으로 쓰여진 뤼트케의 일상사 연구를 세심하게 소개함으로써 한국 독자들에게 뤼트케를, 또한 일상사를 소개하는 가교 역할을 맡고자 한다.
일상사란 무엇인가
“일상사의 목적은 인간의 인식과 행위양식의 다양한 측면을 해명하는 것이다. 일상사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지배적인 행동이나 국가의 행위’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초점은 인간이 온갖 조건 아래서―이를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는 없지만’―살아가고 또 살아남으면서, 스스로 만들어가고 경험하는 일상의 실천에 맞추어져 있다.
일상사 연구와 서술은 미시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동시에 몇몇 개별적인 사례를 통해, 또한 자주 그렇듯이 단 하나의 개별적인 사례만으로도, 각 연구는 서술방식의 새로움과 다층성으로 인해 거대한 형태를, 아마도 전체를 드러내야 한다.”
―알프 뤼트케, 「후기: 한국과의 교류에서 얻은 단상」 중에서.
일상사를 접할 때 제일 흔하게 하는 질문은 ‘일상사에서 일상은 무엇인가’이다. 일상을 장소, 대상 또는 영역으로 정의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반복적인 것, 쳇바퀴 돌리는 리듬으로 보는 경향도 있었다. 또는 일상을 ‘큰 정치에서 벗어난 사적 공간’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팽창하는 자본의 지배에 마지막으로 저항하는 영역으로 일상을 규정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일상의 정의는 뤼트케가 추구하는 일상사와 거리가 멀다. 뤼트케는 일상을 대상화하지 않는다. 일상사의 ‘일상’은 무엇보다 하나의 ‘시각’이다. 사람들이 상황을 인지하고 전유하는 다양한 행위들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태도인 것이다. 매일 매일을 살면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의 다층적이고 다양한 형태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뤼트케는 지배체제나 전체에 대해 손쉽게 질서 구상을 제시하는 것을 회의적으로 보았고, 어떤 거대한 내러티브로 역사를 체계화하기를 거부했다. 일상을 대상화하지 않으니 일상에 접근하는 하나의 방법론이나 이론이 따로 있을 수도 없다. 일상은 다만 복합적인 시점들의 상징으로 기능할 뿐이다.
‘아집’, 순수하게 자기 자신을 위하여 구불구불 가기
일상사를 연구하면서 뤼트케가 제일 신경 써서 개발한 행위 개념은 아집(Eigensinn)이다. 그는 아집을 열린 개념으로 사용했다. 아집은 해방도 아니고 저항도 아니며, 계급, 민족, 종교, 성별 등 그 어디에도 귀결될 수 없는 개념이다. 아집에 따른 행동은 논리정연하지 않고 모순적이면서 가볍고 쉽게 부서질 수 있는 실천들이다. 동기가 뚜렷하지 않고 결과를 의도하지도 않기 때문에 합목적적 행위나 이해관계나 인과관계가 뚜렷한 행동과는 거리가 멀고, 직선적이고 단선적 발전을 찾기는 어렵다. 도리어 구불구불한 나선형의 형태를 띤다. 때문에 아집에 따른 행위에서는 가해, 참여, 동의, 회피, 물러나기, 돌파하기, 연대, 거리두기, 저항, 복종 등의 행위 가능성이 동시에 나타나기도 한다. 지배에 저항하는 사람도 항상 저항하는 것이 아니고, 권력에 동참하는 사람도 항상 똑같이 동참하는 것이 아니다. 동참과 저항 사이에 있는 그 많은 가능성이 항상 언제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다. 다만 이 모든 행위는 행위자가 “순수하게 자기 자신을 위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뤼트케는 설명한다.
뤼트케는 공장노동자의 행위를 연구하면서 이 개념을 처음 사용했는데, 아집은 육체와 감각, 감정과 많이 얽혀 있다. 아집은 노동자들의 뺀질거림, 애매한 행동, 두리뭉술 넘어가는 것, 명확한 입장이 없는 행동들을 관찰하면서 사용되었다. 권력과 지배에 직접적으로 부딪히며 살아남기 위해서 보이는 모습이란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목적지향적인 행위보다는 이런 모순적이고 다층적인 행위가 아닐까. 뤼트케는 아집을 철저하게 추적하고 역사화하면서 인간의 행위공간이 시시각각으로 얼마나 변하는지 잘 보여준다. 역사적 행위자의 실천은 이렇게 비직선성을 가지고 구불구불 가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