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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마전 연구 (양장)

한국 기마전 연구 (양장)

  • 이홍두
  • |
  • 혜안
  • |
  • 2020-07-30 출간
  • |
  • 416페이지
  • |
  • 160 X 231 X 27 mm /730g
  • |
  • ISBN 9788984946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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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 동명성왕 원년 주몽이 말을 가려 준마(駿馬)는 사료를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노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니, 왕이 살찐 것은 자기가 타고 여윈 것은 주몽에게 주었다.(?삼국사기? 권13, 시조 동명성왕)

* 대무신왕 3년 9월에 왕이 골구천에서 사냥을 하다가 신마(神馬)를 얻어 이름을 거루라고 하였다.(?삼국사기? 권13, 대무신왕)

저자는 여기서 고구려 신마 거루의 출현을 중장기병에 사용하는 북방의 호마(胡馬)의 한 예로 보았다. 특히 고구려 중장기병(철기병)이 이 말들을 이용해 국초에 한(漢)제국의 전차부대를 격파한 사실을 주목하였다. 중국왕조들과의 기마전에서 고구려군은 중장기병과 경기병을 같이 운용했는데, 경기병이 기동력으로 승부를 한다면, 중장기병은 방호력과 타격력이 핵심이었다. 따라서 경기병은 주로 정찰하는 척후병의 임무를 수행하고 적군과 교전할 때는 좌우 측면과 후면을 공격하며, 아군이 후퇴할 때는 후방을 엄호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반면 찰갑을 착용한 중장기병은 선봉에 배치하여 적군의 보병 대열을 격파하는 한편으로 긴 창을 가지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보병 대열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였다.
삼국시대 중반 이후 고구려군과 같은 중장기병이 주력군으로 부상하면서, 삼국은 체형이 큰 북방 호마를 적극 수입하여 그것의 사육과 조련에 진력하였다. 중국의 한나라나 위나라 등의 전차는 평지전에서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지만, 협소한 도로나 비탈진 계곡에서는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크게 떨어졌다. 따라서 고구려는 중국왕조와의 전투에서 양맥 골짜기와 비류수 골짜기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전차의 진로를 차단한 다음에 중장기병이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승리를 거두곤 하였다.
그러나 7세기 고구려와 당나라 간의 전투는 달랐다. 양국은 요동의 개활지에서 기마전을 전개했는데, 당나라는 한나라 때 주력군이던 전차를 기병 중심의 편제로 전환하고 일련의 기병전술을 습득하는 군제개혁을 한 결과 고구려에 승리할 수 있었고, 기동력이 우수한 거란기병의 활용과 신라군의 배후지원 등에 힘입어 고구려를 정복할 수 있었다. 신라 역시 고구려 중장기병의 전술을 계승하여 부대를 새롭게 편제하고 고구려 중장기병의 무기가 신라에 유입되면서 백제 및 고구려와 대등하게 전투를 했고, 이를 바탕으로 삼국통일에 이어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신라에 뒤이어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왕조는 474년의 기간 중 북방의 유목민족과 세 번의 큰 전쟁을 수행하였다. 즉, 고려 초기에는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중기에는 여진족의 금나라, 후기에는 몽골족의 원나라를 상대했다. 이들 북방 유목민족은 유목생활의 필연적 결과로 기동성과 집단성을 중시한 데다 말을 타는 기술이 더해지면, 완급을 전개하는 능력이 풍부해져 통제 가능한 군대로 변신하였다. 여기에 활을 쏘는 기량을 결합하면 기사(騎射)가 되는데, 이것이 세계전쟁사에서 유목민이 군사적 우월성을 갖게 된 직접적 요인이다. 고려는 여진이 조공한 달단마와 160개에 이르는 마목장에서 기른 말을 이용해 이들 북방의 유목민족과 대등한 기마전을 전개하였다.
거란과의 제1차 전쟁 때 봉산에서 기마전을 전개했는데, 거란 소손녕이 주요 교통로와 구원병의 지원로를 차단하자, 고려 선봉군은 최전방에 참호를 파고, 참호 뒤의 보병으로 방진(方陣)을 쳐서 거란 기병을 격퇴했다. 또 숙종대 여진과의 전쟁에서는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을 설치한바, 별무반 소속의 신기군은 기병대로써 여진의 기병 격파에 크게 기여하였다.
14세기의 몽골기병은 공성전술이 북방 유목민족 중 가장 뛰어났는데, 그것은 성을 공격할 때 투석기와 충차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그들은 후방의 공격이나 산악기마전 및 방어전에는 매우 취약하였다. 따라서 고려군은 몽골군 침입 때 청야수성전술로 방어하면서 주변의 성과 상호협력체제를 구축하였다. 몽골군이 4차례나 귀주성을 공격하였지만 고려 방어군이 번번이 격퇴한 데서나, 김윤후가 충주성에서 천민군과 함께 수성전을 펼치면서 성 안에서 방어만 하지 않고, 기병을 성 밖에 매복시켜 유격전을 계속하여 몽골군을 물리친 데서 이 전술의 장점은 두드러졌다.
고려를 이은 조선시대에는 무장출신인 태조 이성계가 평생 탔던 말들을 그린 팔준마(八駿馬) 그림이 현재 남아있는데, 이 말들은 달단마 혈통을 계승했다고 보는 것처럼 여진에서 달단마를 공급받았고, 현재의 마장동ㆍ화양동 일대에 ‘살곶이 목장’ 등을 설치하여 말들을 길렀다. 지금도 서울 한양대 캠퍼스 내에는 조선시대 말의 무병과 번식을 기원하는 마제(馬祭)를 지냈던 마조단 터 표식이 남아있기도 하다. 조선전기 대(對)여진 전쟁에서는 여진족 기병들이 대오를 이루지 않고 다니면서 그들의 장기인 강궁(强弓)을 사용해 공격하고 몸을 은폐하는 전술에 대응하여, 조선군은 수성하면서 능선 너머로 포를 쏘아 여진 기병을 격파하는 방법들을 썼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군의 기병전술과 무기는 일본군과의 임진왜란에서는 무기력하였다. 신립이 이끄는 기병대가 탄금대 기마전에서 일본군의 조총에 전멸되자, 조선은 기마전에서 성을 방어하는 수성전술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일본군 조총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조총과 창검을 활용한 단병병법을 일본군이 사용하면서 조선의 기병전술과 무기로는 대응할 수가 없게 되자, 조선은 명나라 척계광이 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입수하여 보병 중심의 전법으로 전환했다. 이로 인해 조선군은 다시 권율 장군의 행주산성 전투처럼 수성전술로 일본군을 물리친 것 등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17세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조선군은 청나라 팔기병을 상대로 수성전술을 계속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조반정때 공신들이 북방 유목민족과 상대할 수 있는 병력동원체계에 대응한 병제 개혁에 실패하였기 때문이었다. 청나라 팔기병과의 교전에서 조선군은 수성전술을 사용하면서 기병을 성 밖으로 출격시켰으나 대부분의 기마전에서 철저하게 패배했다. 다만 김준용 장군이 수원 광교산전투에서 기마전으로 청나라군을 물리친 것이 특이한 경우다.
호란의 패전 이후 조선은 효종대 북벌론과 맞물리면서 5군영을 창설하고 금군의 기병화와 중앙군영의 기병 강화를 목표로 하여 군사편제를 변화시켰다. 특히 기병대 정초청을 설치하여 기병의 호수와 보인의 역할을 각각 분담케 함으로써 기병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한편 17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전쟁은 대포와 총을 사용했는데, 이때 군사들이 쏘는 포의 화염 때문에 앞을 분간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폭발음이 커서 기병이 혼비백산한 사실이 많아 군사들의 전마 조련은 말이 대포와 총소리에 익숙하도록 훈련하는 것이 조련의 관건이었다.
조선은 숙종대 수도방위를 위해 강화도 연변의 진보들에 화포를 집중 배치하였다. 또 정조는 강력한 왕권강화와 북벌 실현을 위해 수원에 장용영을 설치하고, 장용영 기병의 훈련을 위해 ?무예도보통지?를 간행, 여기에 편승하여 당시 기마전의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총기의 눈부신 발전과 자동차의 등장으로 전쟁에서 기마전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늠름한 말 역시 경마장에나 가서야 볼 수 있게 되었다.

말과 기마전 연구는 전근대의 군사력을 가늠할 수 있는 연구로서 군사학적 의미가 매우 크다. 그러나 한국사에서 말과 기마전의 연구는 많이 부족한 실정이다. 한 예로 경기병에 사용되었던 고구려의 과하마(果下馬)는 고대 기병의 주력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일제 때 일본인 학자들이 과하마에 ‘조랑말’이라는 외피를 씌워 쓸모가 없는 하찮은 말로 격하시켰던 것도 큰 원인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고려와 조선의 대북방항쟁사를 종속적이고 수동적 성격의 타율성론으로 규정하면서 우리 말과 기마전에 대한 평가절하도 이루어졌다. 이제 국내 연구자들의 연구가 진전되면서 말과 기마전 분야에서도 일제때의 편향성은 의미를 많이 상실하였다. 저자의 이 책이 우리나라가 북방민족을 상대로 어떻게 대등한 기마전을 전개하고, 이 강산과 사람들을 지켜왔는지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한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목차


머리말

제1장 한국 기마전의 연구 성과와 과제
Ⅰ. 삼국시대 기마전의 연구 성과
Ⅱ. 고려시대 기마전의 연구 성과
Ⅲ. 조선시대 기마전의 연구 성과
Ⅳ. 한국 기마전의 연구 과제

제2장 호마의 사육과 조선시대 마목장
Ⅰ. 호마의 전래와 조선시대 내구마 사육
1. 삼국시대 호마의 전래와 사육
2. 고려시대 호마의 교역과 사육
3. 조선시대 호마의 교역과 내구마 사육
Ⅱ. 조선시대 호마의 생산과 호마목장 설치
1. 내구마 사육과 내승의 역할
2. 내구마 분양과 유양마의 변동
3. 호마 목장의 설치

제3장 내구마 조련과 기병의 무장
Ⅰ. 궁중의 내구마 조련
1. 내사복시의 내구마 조련
2. 사복시의 내구마 조련
3. 유양마의 조련과 마상무예
Ⅱ. 기병의 무장과 기마전
1. 고구려 기병의 무장과 기마전
2. 고려시대 기병의 무장과 기마전
3. 조선시대 기병의 무장과 기마전

제4장 고구려의 중국 전쟁과 기마전
Ⅰ. 한족ㆍ유목민족 전쟁과 기마전
1. 고구려-후한 전쟁과 기마전
2. 고구려-조위 전쟁과 기마전
3. 고구려-전연 전쟁과 기마전
4. 고구려-후연 전쟁과 기마전
5. 고구려-수나라 전쟁과 기마전
Ⅱ. 고구려-당나라 전쟁과 기마전
1. 당 태종의 제1차 침공과 기마전
2. 당 태종의 제2차 침공과 기마전
3. 당 고종의 침공과 기마전

제5장 고려시대 유목민족 전쟁과 기마전
Ⅰ. 거란 전쟁과 기마전
1. 고려의 제1차 거란 전쟁과 기마전
2. 고려의 제2차 거란 전쟁과 기마전
3. 고려의 제3차 거란 전쟁과 기마전
Ⅱ. 여진 정벌과 기마전
1. 고려의 제1차 여진 정벌과 기마전
2. 고려의 제2차 여진 정벌과 기마전
3. 윤관의 9성 축성과 양국의 기마전
Ⅲ. 고려의 몽골 전쟁과 기마전
1. 고려의 제1차 몽골 전쟁과 기마전
2. 고려의 제2차 몽골 전쟁과 기마전
3. 고려의 제3차~제6차 몽골 전쟁과 기마전

제6장 조선시대 대외전쟁과 기마전
Ⅰ. 조선의 야인 정벌과 기마전
1. 동북면 야인 정벌과 기마전
2. 서북면 제1차 야인 정벌과 기마전
3. 서북면 제2차 야인 정벌과 기마전
Ⅱ. 일본의 조선 침공과 기마전
1. 탄금대 전투와 기마전
2. 평양성 전투와 기마전
3. 행주대첩과 기마전
Ⅲ. 청나라의 조선 침공과 기마전
1. 정묘호란과 기마전
2. 병자호란과 기마전
Ⅳ. 병자호란 이후 전술의 변화와 기병대 창설
1. 수도방위체제 변동과 ?연병실기? 병법 수용
2. 포수와 화포 사용을 통한 기마전
3. 정초청의 설치와 기병대 창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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