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막히고 인생이 꼬인 것 같을 때 만나는
그림, 그리고 예술가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친 지 6개월.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마음 깊숙이 자리한 불안은 어쩔 수 없다. 코로나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고 2차 대유행도 곧 시작될 거라는 전문가들의 예측이 빠르게 현실이 되면서 급속도로 위축되는 경기, 더욱 심해진 취업난과 높아진 실업률, 간단한 모임조차 조심스러워진 일상을 생각하면 ‘이 시국에 미술 감상’은 달라진 현실에도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는 일부 사람들의 한가한 취미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는 사람들, 성실한 근로자이자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주어진 역할을 해내는 사람들, 달라져버린 일상에도 어떻게든 나다움을 지키려는 사람들, 불안하고 두려워도 오늘 하루를 긍정하고 싶은 사람들, 자신만의 장점과 고유한 감각을 잃고 싶지 않은 사람들, 현실이 팍팍해도 좋아하는 미술 한두 점 정도는 가슴에 품고 사는 여유를 갖고 싶은 사람이라면 잠시 멈춰 서서 이세라 작가가 소개하는 그림과 예술가에게 눈길을 주어도 좋다.
이세라 작가는 첫 책《미술관에서는 언제나 맨얼굴이 된다》를 통해 서른한 명의 예술가를 소개한다. 어떤 예술가는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국립현대미술관 같은 곳에서 한번쯤 접했던 익숙한 인물이지만, 어떤 작가들은 이름조차 생소하다. 기존 미술 에세이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설치미술에 심지어 ‘미술 에세이에 왜 이런 주제가……?’ 싶은 글들도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떤 기준으로 예술가와 작품을 골랐을까? 코로나 현실을 살아가는 바로 오늘, 지금 우리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는 인물과 작품이다. 처음 마주하는 위기 앞에서 흔들리는 우리처럼 사방에서 날아오는 시련을 온몸으로 맞았던 예술가들, 그래도 속수무책으로 주저앉기보다 기꺼이 받아들이고 극복하려 애를 썼던 그들이 온 생을 바쳐 완성한 작품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뜨겁게 자신의 삶과 가치관을 지켜냈던 예술가들이 결코 특별한 유전자를 가진 인물들이 아니라는 사실, 배경지식을 알면 더 좋겠지만 그런 것쯤 몰라도 그림 앞에서 울고 웃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사실, 미술은 우아하고 화려하고 어려운 무언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세라 작가는, 인생은 누구에게도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스스로를 믿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우리도 이 책의 예술가들처럼 자기 인생의 주인공으로 우뚝 설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전한다. 작가의 친절하고 다정한 안내로 한 작품 한 작품을 따라 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좀 더 단단하고 뜨거워진 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고귀한, ‘있어 보이는’ 특별한 취미가 아닌
평범한 일상과 다를 바 없는 미술 이야기
커피 한잔을 마셔도 인스타그램에 인증부터 하는, 바야흐로 ‘있어빌리티’의 시대이다. 취미를 일만큼 중요하게 여기고 남다른 취미를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림 감상은 여전히 우리에게 조금은 특별한 취미에 속한다. 예술사도 좀 알아야 할 것 같고, 미술관에 갈 때는 옷도 차려입고 행동도 평소와 다르게 해야 할 것 같다. 유명한 작품이라니 일단 가서 보는데 ‘이게 왜?’ 하는 순간 머쓱해지기도 한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들여다보고 싶어도 다른 관객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급히 사진만 찍고 나와야 할 것 같다. 인스타그램에 문화생활, 미술관나들이, 전시회 같은 해시태그를 달아 업로드하지만, 뭘 보고 뭘 느꼈는지보다 좋아요를 몇 개나 받을지, 어떤 각도에 어떤 어플을 써야 사진이 예쁘게 보일지 고민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그림 감상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
그런데《미술관에서는 언제나 맨얼굴이 된다》에서 소개하는 작가와 작품 상당수는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추억 등 소위 ‘예쁜 무엇’과는 거리가 멀다. 화사한 그림, 기분 좋아지는 그림이 가득한 예쁜 미술책을 기대했다면 생각보다 묵직한 이야기 앞에서 멈칫할 수도 있다. 이세라 작가가 나누고자 하는 미술은 ‘이게 정말 인간이 그린 거야?' 하는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 아닌 사람 냄새가 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성공한 예술가의 아내로 남고 싶지 않았던 마리 크뢰위에르, 쏟아지는 찬사에도 평생 스스로에게 만족할 줄 몰랐던 알브레히트 뒤러, 평론가들의 비판과 조롱에도 꿋꿋하게 인간의 밑바닥 욕망을 가감없이 조망한 잭 베트리아노,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도 화폭 앞에서도 직진만 했던 잭슨 폴록, 사랑받는 게 인생의 전부였던 과거로부터 용감하게 빠져나온 트레이시 에민, 성폭력 범죄 피해자가 아닌 최초의 여성 화가로 이름을 남긴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이들의 삶은 결코 감탄할 만하지 않고 아름답다고 말하기도 애매하지만, 보통 사람인 우리의 일상과 너무나 닮아 있다. 언젠가 인정받는 날, 행복한 날, 웃는 날이 오리라는 희망 하나로 그리고 또 그리며 자신을 믿었던 예술가들은, 그래서 멀리 있지 않다. 작가가 소개하는 예술가들 중 내 마음을 사로잡는, 나와 닮은 인물 몇 명은 어렵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