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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길 박용길

봄길 박용길

  • 정경아(엮음)
  • |
  • 삼인
  • |
  • 2020-06-10 출간
  • |
  • 319페이지
  • |
  • 148 X 210 mm
  • |
  • ISBN 9788964361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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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전쟁의 시대, 가족
“제 일생의 채찍, 거울, 그리고 힘이 되어주시겠습니까?”(문익환의 청혼 편지 중에서)

삼일운동이 전국을 휩쓸었던 1919년 가을, 황해도에서 태어난 박용길은 대한제국 기마장교였으나 한일합병 이후 광산분석기사로 일하던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네 살 때부터 평안북도 대유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 살 때부터는 원래 부모의 출신지인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고 경기여고를 졸업한 뒤 요코하마신학교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공덕귀를 비롯하여 신앙을 바탕으로 평생 뜻을 함께할 친구들을 만났고, 문익환도 조선인 신학생들의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문익환의 건강이 좋지 않다고 염려하여 결혼을 반대했던 박용길의 가족은 ‘6개월을 살더라도 문익환과 결혼하겠다, 그마저도 안 된다면 평생을 혼자 전도사로 살겠다’는 그녀의 선언에 문익환의 건강을 병원에서 직접 점검하고 결혼을 허락했다. 1944년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중국 용정으로 떠났다. 문익환의 집안이 19세기 말 북간도로 이주하여 명동촌을 중심으로 터를 닦은 조선 실학자 출신이었기에.
목회자의 아내로 살림을 시작한 박용길은 해방 직전에 낳은 첫아기를 홍역으로 잃고, 해방 직후엔 조선인 피난민들이 중국 떠나는 것을 지원하느라 이듬해에야 피난을 떠나 두 달여 끝에 서울에 도착했다. 둘째를 임신한 상태의 피난길이었고 그렇게 1953년 정전협정 직전까지 호근·영금·의근·성근을 낳고 키웠다. 시아버지 문재린 목사의 시무지를 따라 시댁 식구들과 서울·경상도·제주도로 옮겨 다니며, 그리고 미국 유학 중이던 문익환이 유엔군으로 일본에서 근무할 땐 한인교회 전도사가 되어 도쿄에서 지내며.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어느덧 35세가 된 네 아이의 엄마 박용길에게, 전쟁 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뼈저리게 깨에 충분한 세월이었다.

개척의 시대, 살림
“예수님의 여제자들, 숨은 봉사자, 믿음의 부인들”

1955년에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문익환이 한신대 교수로 임용되어 가족들은 한신대 캠퍼스 사택에 정착했다. 박용길은 문재린 목사 인도로 설립된 실향민교회인 서울중앙교회(한빛교회의 모태)의 집사로서, 시어머니 김신묵 권사와 짝을 이루어 교회 살림을 도맡았으며, 경기여고 동창들과 원광회 등의 모임을 통해 전후 구호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1956년부터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 여신도회 임원이 되어 고희 때까지 교회여성운동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는데, 김신묵이 아이들 돌봐주기를 자청하며 며느리를 지원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용길은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서기·청유부장·기획부장·총무 등을 역임하면서 여러 행사와 사업을 이끄는 한편으로 여신학자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그달의 양식》 창간호에 「예수님의 여제자들」이란 글을 게재하여 ‘예수가 여성의 지위를 존중했다’는 여성주의적 입장을 일찍이 강력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한국 교회 연합활동에도 역량을 발휘하여, 1954년 이래 지금까지도 출간되고 있는 기독교 가정잡지이자 여성잡지인 《새가정》의 출판과 운영에 참여했다. 1970년에는 지금 ‘통일의 집’이 자리한 수유동에 터를 잡았고 1975년엔 한빛교회의 첫 여성 장로로 안수받았다. 1988년에는 기장 여장로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교회 여성들의 지도력 향상을 위해 보다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발휘했다.

죽음의 시대, 편지
“매일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날아갈 소식을
매일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받으시길”

기장 여신도회 임원 모임 장소인 기독교회관 301호는 1974년 민청학련 군법회의 재판이 있던 날부터 구속자 가족의 사랑방이 되었다. 구치소를 오갈 때, 시위가 있을 때, 재판이 열릴 때, 또 맡겨둘 물건이 있을 때, 구속자 가족들은 여신도회 사무실을 찾아왔다. 박용길은 구속자들과 가족들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돌보며 구속자가족협의회 결성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민주화운동의 긴 여정에 발을 들여놓았다.
박용길의 옥바라지는 1976년, 그녀가 58세 되던 해에 시작되었다.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때부터 문익환은 사망하기 전까지 총 여섯 차례 수감되었다. 남편이 옥고를 치르는 동안 박용길은 밖에서 가족들의 투쟁조직을 이끌며 성장해갔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 협의회 회원들과 거리로 나서 평화시위의 역사적 장을 열어갔다. 양심수 가족들은 가족 모임을 통해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면서, 입에 검은 십자가 붙이기, 재판 방청권 불태우기, 양산·부채에 글씨 써서 시위하기, 옷에 붉은 십자가 달고 재판정 들어가기, 보라색 옷 입기, 보라색 숄 뜨기 등으로 늘 함께 행동했다. 박용길 외에 이소선·이휘호·이종옥·김석중 등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굳건히 싸운 가족운동은 1970, 80년대 민주화운동을 가능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박용길은 감옥에 있는 남편에게 편지로 감옥 밖의 소식을 전하면서 그가 우울해하거나 외로워하지 않도록 활력을 불어 넣어주었고, 사소한 일상사까지 공유함으로써 늘 함께임을 환기시켰다. 꽃잎을 말려 편지지에 문양을 디자인해 붙이거나 노래와 시를 옮겨 적는 등 그녀의 탁월한 손재주와 디자인 감각,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감옥으로 가는 서신에 발휘되었다. 여신도회·가족운동 일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꾸준하고 성실하게 마음을 담아 보냈다. 편지는 부부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달래면서, 그들이 각자 처한 자리에서 뜻을 굽히지 않고 의로운 길을 계속 가도록 북돋는 매일매일의 믿음의 증표 같은 것이었다.

손을 잡는 시대, 사랑
“나는 꽃다발을 들고 군사분계선 위에 올라섰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봄길인 당신께”

박용길이 김일성 주석의 1주기 조문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판문점으로 귀환한 것은 그녀의 나이 77세 때였다. 1994년 문익환이 사망한 뒤 통일맞이칠천만겨레모임을 설립하고 난 이듬해였다. 남편의 방북 기간이 열흘도 채 되지 않았던 데 반해 그녀는 한 달여를 북한에 머물렀고, 53년 만에 어머니의 묘를 찾았고 옛 이웃들과 상봉했다. 그녀는 귀환하자마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되었고 국제앰네스티 양심수로 인정받았으며 집행유예로 4개월 뒤 석방됐다. 2000년대 초반부터는 6.15 남북공동선언 실현을 위한 통일연대 공동준비위원장을 맡았고, 2005년에 민주화와 남북화해에 헌신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같은 해 남과 북이 언어 이질화를 극복하고 함께 사용할 사전을 만드는 ‘겨레말큰사전’ 사업도 착수하도록 이끌었다.
칠순, 팔순을 넘어서까지 기독교운동·민주화운동·통일운동에서 박용길이 걸은 행보는 한 어른이 사회에 발휘할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세대들이 어울리고 힘을 합쳐 만들어가는 역사를 가능하게 하는 한 어른의 리더십을. 누구든지 딛고 갈 수 있도록 그 자신을 내어주는 길, 그것이 봄길의 삶이었다. 봄길은 2011년 93세에 노환으로 삶을 마감했다. 겨레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뒤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문익환의 곁에 안장됐다. 3천 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았고, 아름다운 꿈을 함께 꾸었던, 그렇게 역사의 한복판으로 손잡고 들어갔던 연인의 옆자리에.
십 년 넘게 책 나오길 기다리다 세상을 뜨신 박용길 장로님에게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지만, 한편으로는 책이 한참 후에 나오게 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책이 바로 일찍 나왔더라면 봄길 박용길의 전기는 방북 이야기로 마무리되었을지 모르고, 그랬더라면 진정한 통일꾼으로서 생의 마지막을 불태운 행적은 다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에 때가 있다”며 느긋해하던 봄길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염(봄길 박용길 전기 편집위원회를 대표하여), ‘책을 펴내며’ 중에서

[박용길의 이력]
봄길 박용길은 1919년에 황해도 수안면에서 태어났고, 네 살 때 평안북도 대유동으로 이사하여 6남매 중 넷째 딸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서울 경성공립여자고등학교(현 경기여고)를 졸업한 뒤 1937년 일본 요코하마공립여자신학교에 들어갔고, 이듬해 조선인 신학생들의 모임에서 문익환을 처음 만났다. 1944년 문익환과 결혼하여 중국 만주에서 목회자의 아내로 신혼살림을 시작했고 해방과 전쟁 중에 서울·경상도·제주도·일본 도쿄를 오가며 호근·영금·의근·성근을 낳고 키웠다. 1955년에 한신대 캠퍼스 사택에 정착했고, 경기여고 동창들과 전후 구호 활동에 앞장섰으며,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임원으로 고희 때까지 교회여성운동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1970년에 지금 통일의 집이 자리한 수유동에 터를 잡았고 1975년엔 한빛교회의 첫 여성 장로로 안수받았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때부터 10년 넘게 남편을 옥바라지했으며, 민주화실천가족운동 협의회 회원들과 거리로 나서 평화시위의 역사적 장을 열어갔다. 1994년 문익환이 사망한 뒤 통일맞이칠천만겨레모임을 설립하여 통일운동을 이어갔고, 1995년 김일성 주석 1주기 조문을 위해 직접 북한을 방문했다. 이 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 국제앰네스티 양심수로 인정, 집행유예로 4개월 뒤 석방됐다. 2005년에 민주화와 남북화해에 헌신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2011년 93세로 삶을 마감하고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문익환의 곁에 안장됐다.


목차


추천의 글 시대적 소명을 살아낸 한 여성을 기억하며 | 한명숙
책을 펴내며 부드럽고 거룩한 분노의 영성, 박용길

전쟁의 시대, 가족
기미년 가을, 황해도
1920년대 광산촌 마을공동체
평안북도와 서울을 오가며
일제의 고등학교 서열
시조 대회의 남색 저고리
안동교회에서 길을 찾다
요코하마의 학창시절
청년 문익환
어지러운 시절의 사랑
이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면
만보산의 까만 연기
첫 번째 아기
해방과 혼돈, 난민과 폭도
털리고 또 털리며 남으로
하늘의 처분
북간도에 간 조선 실학자들
황금동 대가족
전쟁, 아이들의 울음소리
그래도 가족은 계속된다

개척의 시대, 살림
여성 순교자를 기억하기
두 어머니
실향민들이 개척한 한빛교회
수유리 캠퍼스의 부인들
여신도회가 시작한 일
그들은 예수님의 여제자였다
1950년대에 나온 가정잡지
여성 장로와 함께 기도를

죽음의 시대, 편지
4월 19일 깨어난 사람들
이제 세상으로 나갈밖에
삼일절 쉰일곱 돌맞이
구치소 뒷산에서 노래를
보랏빛 투쟁, 씩씩한 사랑
가족운동이 없었다면
신앙공동체의 실험 갈릴리교회
편지가 할 수 있는 일
매일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1979년에 일어난 일들
전대미문의 음모
눈물을 닦고, 그래도 편지
민가협의 해바라기들
6월의 맨 앞에 선 어머니

손을 잡는 시대, 사랑
평양으로, 감옥으로 가게 하라
처음 앓는 감옥병
분신정국과 노구의 사제
문익환을 심고
꽃을 안고 군사분계선을 넘다
양심수 봄길의 가슴속 눈물
불어라 통일바람!
햇볕을 받자 부는 바람
인생은 흘러간다
당신의 덕이죠

엮은이의 글 언제나 봄
주석-참고문헌
연보 봄길 박용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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