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1665년 런던을 휩쓸다』는 영국 소설가 다니엘 디포의 ‘A Journal of the Plague Year’을 옮긴 것이다. 1722년에 처음 발표될 당시에 ‘1665년 전염병 대유행 때 런던에서 벌어진, 가장 두드러진 사적 및 공적 사건들에 관한 관찰 또는 기록’(Being Observations or Memorials, Of the most Remarkable Occurrences, As well Publick as Private, Which Happened in London During the last Great Visitation In 1665)이라는 긴 부제가 달려 있었던 이 책의 지은이는 ‘런던에서 모든 것을 겪은 한 시민’으로 되어 있었다. 책 맨 마지막에는 ‘H. F.’라는 이니셜이 있었다. ‘최초 공개’라는 문구도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은 당연히 표지의 내용 그대로 1665년에 페스트가 런던을 휩쓸 당시에 현장을 지켜본 사람이 남긴 기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다가 영국 지지학(地誌學)의 아버지라 불리는 리처드 고프(Richard Gough)가 1780년에 『영국 지지학』(British Topography)에서 “‘A Journal…’은 런던의 화이트채플에 살던 마구(馬具) 상인이 적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진짜 저자는 다니엘 디포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이 작품은 소설로 여겨지면서 동시에 장르를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영국 지지학자 에드워드 웨들레이크 브레일리(Edward Wedlake Brayley: 1773-1854)는 1835년에 이 책에 대해 “결코 픽션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는 디포의 설명과 당시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널리 인정받는 책들, 즉 너새니얼 하지스(Nathaniel Hodges)의 ‘로이몰로기아’(Loimologia)와 새뮤얼 핍스(Samuel Pepys)의 일기, 토머스 빈센트(Thomas Vincent)의 ‘도시에 페스트와 화재로 들렸던 신의 무서운 목소리’(God’s Terrible Voice in the City by Plague and Fire) 등을 비교한 결과 그런 결론을 내렸다. 또 학자 왓슨 니콜슨(Watson Nicholson)도 1919년에 “디포의 ‘A Journal…’에 나오는 런던 전염병 대유행과 관련한 내용 중에서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은 단 한 줄도 없다.”고 밝히면서 ‘진정한 역사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혹여 창작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사소하고 비본질적이며, 픽션보다는 역사에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이다.
현재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19의 위력을 보면, 이 책의 내용 중 상상 속에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페스트 희생자를 수백 구씩 한 구덩이에 무더기로 묻는 것도 350년도 더 지난 지금 미국에서 그대로 벌어지고 있으니, 지금의 현실이 오히려 더 픽션 같다.
대재앙 당시 디포의 나이는 다섯 살에 불과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H. F.’라는 이니셜을 근거로, 이 책 속의 일인칭 화자(話者)의 직업과 같은 마구(馬具)상으로 화이트채플에 살았던 디포의 삼촌 헨리 포(Henry Foe)의 일기를 바탕으로 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디포의 의도는 역사적 사실들을 충실하게 기록해 후대의 사람들이 비슷한 상황에 처할 경우에 거울로 삼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디포가 이 책을 쓴 것은 1771년으로, 마르세유에서 잉글랜드로 전염병이 넘어온다는 소문이 돌던 때였다. 그렇다면 이 책은 전염병에 대비한 실용적인 핸드북인 셈이다. 이 책이 제시하는 최고의 예방책은 무조건 전염병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다.
당시 런던 시 당국이 전염병에 대처한 방식은 지금과 다를 바가 별로 없다. 기술적인 세부사항만 달라졌을 뿐, 놀랍게도 그때도 격리, 역학 조사, 무증상 감염, 잠복기, 사회적 거리두기, 면역 등의 개념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