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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우 김약제 일기

청우 김약제 일기

  • 김약제
  • |
  • 태학사
  • |
  • 2020-03-02 출간
  • |
  • 622페이지
  • |
  • 161 X 231 X 44 mm /808g
  • |
  • ISBN 9791196964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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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김약제라는 인물, 그리고 일기의 시작
김약제는 고려 말의 절신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의 17세손이자 직언으로 사림의 존경을 받았던 학주(鶴洲) 김홍욱(金弘郁)의 9세손이다. 가까운 직계 선대에서 찰방, 현령, 현감, 참봉 등을 지낸 경우는 있었으나 문신(文臣)은 배출하지 못한 집안이었는데, 그런 가운데서 김약제는 1885년(고종 22) 식년 진사시에 입격하고, 이듬해인 1886년 정시(庭試) 문과에 합격하여 관계에 진출하게 된다. 이후 약 8년간 관계에 몸 담으면서 부교리·교리·장령·수찬·우통례·사성 등의 요직을 수행하며 국왕의 신임을 받았고, 학식과 문장이 뛰어나 경연관으로서 국왕을 보도하는 등 비교적 청화(淸華)한 길을 걸었다. 그러나 1892년 우통례 재직 시 산릉(山陵) 상제에 대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는 수난을 겪게 되는데, 그의 일기는 이때의 일부터 시작된다.
이 책의 원본인 《김약제 일기》는 모두 4권으로, 1권에는 벼슬길에서의 부침과 유배의 일상이, 2권에는 19세기 실무 관료로서 행한 공무 수행의 궤적이, 3권에는 동학과 개화를 바라보는 보수 관료의 시선과 인식이, 4권에는 변화하는 시대에 대한 우려와 무력감이 담겨 있다.

일기 제1권(1892. 4. 7~1892. 10. 30)
제1권에서 주목되는 사안은 고금도에서의 유배생활로, 유배지식인들의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해당 분야 연구를 더욱 촉진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의 뭉치가 된다.

일기 제2권(1892. 11. 1~1894. 2. 13)
제2권은 서울에서 벼슬에 종사할 때의 기록으로, 국가 및 왕실의 의례, 과거 운용 실태를 비롯하여 중앙 관료들의 상호 교유의 면면들이 매우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어 당시의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일기 제3권(1894. 2. 14~1895. 10. 12)
김약제의 일기 가운데 사료적 가치가 가장 높은 부분이다. 이때 일기의 핵심 주제는 동학의 향배, 일본의 침략상,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파에 대한 인식, 반상의 위계가 무너지는 세태에 대한 비감, 청일전쟁, 민비 시해 사건 등인데, 모두 한국 근대사의 쟁점이자 현안을 이루는 중요 사안들이다. 김약제는 보수 유림의 관점에서 시사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동학을 반란으로 규정했고, 김옥균 등 이른바 개화파에 대한 적대적 시선을 숨기지 않는다.

“3일제(三日製)에 급제한 홍종우는 10년 동안 일본에서 온갖 풍상(風霜)을 겪고 대역죄인(大逆罪人) 김옥균을 잡아 왔다. 오늘 이에 대해 진하를 할 뿐이었다.” - 제3권 〈1894년 4월 27일〉

김약제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서산으로 내려온 것은 1894년 6월 10일이었다. 이 무렵부터 그는 서울과의 정보 단절에 답답함을 느끼는 가운데 동학의 위협을 체감하게 된다.

“동학의 소요가 크게 일어나 내포(內浦) 전체에서 입도(入道)하지 않는 자가 거의 드물었다. 인심이 흉흉해져 가장 먼저 봉변과 욕을 당한 자는 ‘양반’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람들이었다. 소위 양반이라는 자들은 전부 집을 옮겨 도피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동학교도는 떼를 짓고 무리를 이루어서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남의 무덤을 파고 남의 집을 허물었으며 결박하여 구타하였는데, 입도하지 않은 양반으로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인심이 누란지세(累卵之勢)와 같이 위태로웠다. (…) 가장 먼저 피해를 입은 자는 ‘양반’이라고 이름 붙은 사람들이었고, 그다음은 부자였다. 부자 중에도 이끄는 대로 입도하게 되면 구차하게 그 피해를 모면하기도 하였다. 나도 전실(前室)인 송씨(宋氏)를 서산(瑞山) 미역평(彌役坪)의 남쪽 기슭에 매장한 지가 16년이 되었는데, 서산 고양동(高陽洞)에 사는 주(朱) 아무개가 와서 파서 옮길 것을 독촉하였다. 형세상 어쩔 수 없어 날을 잡지 않고 가서 이장(移葬)을 하였다.” - 제3권 〈1894년 7월 25일〉

1894년 9월 26일 일기에는 동학에 등을 돌리는 사회적 분위기가 언급되어 있지만 그 기세는 금세 꺽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에 유림들은 ‘유회(儒會)’를 결성하여 대응책을 모색하는 가운데 전봉준 토벌 사실에 크게 안도하게 된다.

비적(匪賊)의 우두머리인 전봉준(田鳳俊)[全琫準]의 무리를 토벌했다고 한다. 수십 줄의 윤음(綸音)이 한문과 한글로 갑자기 내려왔다. 순무사(巡撫使)의 방시문(榜示文)을 전하고 초토사(招討使)의 방문(榜文)을 여러 차례 전파하였는데, 모두 글의 뜻이 간절하였다. - 제3권 〈1894년 12월 3일〉

이듬해인 1895년의 현안은 일본화로 일컬어지는 개화, ‘광서(光緖)’ 연호에서 ‘개국(開國)’ 연호로의 개정, 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 사건 등이다. 김약제는 이른바 개화를 통한 관제 및 의복의 개정, 관료의 축소 등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나아가 그는 개화의 주론자인 박영효(朴泳孝)에 대해서는 불궤인(不軌人)이란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는데, 이는 김약제의 개화파 인식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불궤인(不軌人) 박영효(朴泳孝)가 일본에서 돌아와, 일본의 위세를 믿고 세도를 부려 개화(開花)를 칭하며 내무대신(內務大臣)이 되었다. 작년 6월부터는 그의 권력에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또 불궤(不軌)한 마음을 가져서 영국(英國)이 공법(公法)으로 논단(論斷)하였는데, 일본으로 도주하여 사람을 시켜 붙잡아 오라고 하였다는데 자세하지 못하다. 불궤인 서광범(徐光範) 역시 박영효와 함께 위세를 부렸다. 이 사람 역시 같은 죄를 저질렀다고 한다.” - 제3권 〈1895년 윤5월 26일〉

일기 제4권(1895. 10. 13~1898. 11. 15)
제4권에서 주요 관심사로 다뤄지는 내용은 러시아 군대의 조선 주둔 및 아관파천, 개화에 대한 저항감, 명성황후 복위, 단발령, 영학(英學) 등 이학(異學)에 대한 우려 등이다. 한편, 제4권의 명장면을 꼽으라면 전우(田愚)와의 만남을 빠트릴 수 없다.

“초팔일(初八日)에 일장령(逸掌令) 간재(艮齋) 전우(田愚)가 용곡(龍谷)에 내방하기에 맞이하였다. 비로소 평생의 소원을 이루었는데, 이름을 대고 만남을 요청하여 그대로 배알했다. 나이는 지금 58세인데도 귀밑머리가 하얗지 않고 얼굴이 윤택하며, 축적된 도가 몸에 가득 차서 넘치니(粹面?背) 진실로 도학(道學)의 군자(君子)라 이를 수 있다. 한바탕의 말씀(言語)에 스스로 아득해졌다.” - 제4권 〈1898년 10월 11일〉

김약제의 말년과 일기의 의미
김약제는 1894년 고향으로 돌아온 후 양친(養親) 및 교자(敎子)에 전념하며 한사(寒士)처럼 생활했고, 1905년 을사늑약 때는 충분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하려 했으나 양친이 계신 탓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자 세사와는 절연하게 되는데, 이 무렵 일제는 은사금을 매개로 회유하려 했다. 당시 은사금을 거부하는 자는 교형(絞刑)에 처한다는 협박이 있었지만 그는 이를 단호하게 뿌리치고 그해 12월 28일 자진함으로써 세신(世臣)으로서의 의를 행하게 된다. 이처럼 그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신자(臣子)의 도리를 다했던 절사였을 뿐만 아니라, 향중에서는 공손함과 예법을 지켜 모범적인 선비로 추앙을 받았고, 가정에서는 효자(孝子)이자 자부(慈父)로서 집안을 이끈 모범적인 가장이었다. 이런 행적으로 인해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절조를 바꾸지 않는 맑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또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의 해제를 쓴 한국학중앙연구원 김학수 교수는 김약제 일기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김약제는 호서 명가 학주 가문의 자제로 태어나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그 학문이 석학(碩學)의 범주에 이르지 못했고, 문과 출신의 엘리트 문신으로 활동하였지만 공경(公卿)의 지위를 얻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지식인이자 치자(治者)로서 자기 시대에 대한 남다른 사명의식과 책무감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고뇌하고 번민했다. 물론 왕조에 대한 충신(忠信), 동학 및 개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그가 추구했던 가치가 수구성(守舊性)에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지만 그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그 신념을 희석시키지 않았다. 신념의 일관성은 그 기록의 신뢰성을 담보하기에 부족함이 없는바, 그의 일기는 한말 보수 유림이 혼돈에 빠진 자기 시대에 대한 체험의 산물이자 질실(質實)한 기록의 행위였다. 한국 근현대사의 인식의 확대를 위해 그의 일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목차


해제

청우일기 제1권(1892. 4. 7.~1892. 10. 30.)
청우일기 제2권(1892. 11. 1.~1894. 2. 13.)
청우일기 제3권(1894. 2. 14.~1895. 10. 12.)
청우일기 제4권(1895. 10. 13.~1898. 11. 15.)

부록: 김약제 행록 및 제문·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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