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OECD DAC에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해외원조를 실시한 이래 우리나라 국제개발협력의 역사는 벌써 10여 년이 지났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의 실적 위주 개발원조의 관행을 돌아보고 성과 및 실패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할 시점이라 여겨진다. 본서는 우리나라의 개발원조를 정교화함에 있어 바탕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번역되었다.
현재 우리나라 국제개발협력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으나 여전히 제한적인 것이 현실이다. 그중에서도 중요하게 제기된 문제는 지역별 특성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여 일률적인 접근을 통해 해외원조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실효성이 제한적이었다는 반성이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몇 년간 지역학 관련 서적이 출판되고 대학 부설 연구소가 다수 설치되는 등 지역학을 기반으로 한 국제개발협력 관련 연구가 상당히 진행되었다. 또한 지역학과 연관성을 지니는, 원조의 진행방식에 대한 문제의식도 엿보인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공적개발원조 프로그램 실행과 평가의 주요 주체는 기관들로, top-down 방식 위주로 진행되어 현지의 복잡한 사회관계의 결과물로서의 개발수요를 적절히 반영하지 못한 점도 실효성 한계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그러나 지역학에 대한 연구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의 개발원조 관행의 변화를 통해 실효성을 제고하기 위한 두드러진 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본서는 이러한 문제 해결에 실마리를 제공한다.
본서는 경제 지리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면서 미국 미네소타 대학 Interdisciplinary Center for the Study of Global Change의 부소장을 역임한 후 현재 UCLA 지리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Eric Sheppard를 필두로, 미네소타 대학에서 아프리카 전문 지리학자로서 지리학과 교수를 역임한 Philip W. Porter, 미네소타 대학의 Ames Library of South Asia의 남아시아 전문가로 근무하는 David R. Faust, 미네소타 대학의 Gender, Women, and Sexuality Studies 교수인 Richa Nagar 등 4명이 공동집필하였다. 그 결과 본서는 정치경제학적, 역사적 관점뿐 아니라 후기 식민주의, 페미니즘 등 다양한 시각을 바탕으로 국제개발의 과정과 결과를 조망하고 있다. 미국의 독자를 대상으로 한 국제개발 분야 입문서로 저술되어 해당 분야 학자들의 호평을 받은 바 있으며, 지금까지 강의교재 및 교양서로 활용되어왔다.
저자들은 주로 지리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지역의 특수한 환경 및 사회적 구조가 국제개발원조와 담론적, 관행적으로 엮여오면서 개발도상국의 주민과 공동체의 현실을 규정했는지를 이론적, 실증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본서의 구체적인 내용은, 역사적 관점에서 식민주의, 세계화 등 세계의 지리적, 사회적 통합과정을 논의하고, 이러한 사회구조적 변화가 개발도상국에서 지구환경에 적응하면서 생계를 유지해가는 가구 공동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세계의 통합과정을 통해 역사적으로 끈질기게 유지되고 있는 세계의 구조적 불평등에 대항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는 노력을 소개하면서, 이를 지지하기 위한 독자의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666페이지에 달하는 묵직한 분량에 걸쳐 1) 인식론적 경합과 지식의 권력성, 2) 환경적 차이에 따른 차별화된 생계형태, 3) 세계의 지리적, 사회적 통합에 대응하는 전략 등 세 가지 부문으로 나누어져 논의되고 있다.
본서의 모든 내용이 국제개발원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특히 우리나라 국제개발원조 관련 연구 및 정책의 지평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역자가 판단한 중요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리학에서 제시하는 다중 스케일적 관점이다. 본서는 전 지구적, 국가적인 상위 스케일에서의 사회구조적 변화(예: 세계화, 식민주의)가 하위 스케일에 위치한 개발도상국 주민의 생계와 공동체의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켜온 양상을 다룬다. 따라서 개발도상국 주민의 삶의 질을 개선시킨다는 개발원조의 궁극적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종합적인 관점의 예를 제시하고 있다. 둘째, 지역과 환경, 생계의 지역 차별성과 상세한 연구의 필요성을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특히 본서는 현지에서 상당한 기간을 체류하면서 연구를 진행하는 민족지학적 연구기법을 통해서만이 도달할 수 있는 지역, 환경, 생계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접근법은 기관들 간의 top-down적 접근법 위주의 우리나라 개발원조 관행을 현지에서 진행되는 양상(on-the-ground)으로까지 확장시킴으로서 지역별로 다르게 나타나는 개발수요에 더욱 적절히 대응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발전과 지역 구분에 대한 다양한 담론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국제개발원조 분야의 주요 주체는 원조를 제공하는 쪽(주로 선진국, 또는 제1세계, 또는 지구 북반구)과 원조를 제공받는 쪽(주로 개발도상국, 또는 제3세계, 또는 지구 남반구)으로 나누어져 자원이 오가므로 권력관계가 개입될 수밖에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권력관계는 국가 간의 직접적 원조관계 형성뿐 아니라 발전에 대한 정의 및 방법론, 제1세계와 제3세계의 구분 등 지식과 개발관행까지도 관통해서 나타나게 된다. 우리나라는 과거에 - 그리고 현재까지도 - 제3세계로 분류되어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는 과정에서 학습한 바 있는 주류 발전경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관행을 현재 개발원조를 제공하는 과정에서도 적용하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보아야 할 때라 여겨진다. 발전과 발전정도를 측정하고 분류하는 기준에 대한 비판적 점검을 통해 우리나라가 전 지구적 국제개발원조에서 차지하는 위치성을 다시금 설정하는 데 있어 담론에 대한 본서의 비판적 분석이 출발점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본 역서 번역 과정에서의 특이점 몇 가지를 언급하는 것이 독자의 이해를 도울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먼저 본 역서는 24개의 장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21개의 장을 순차적으로 번역하였다(지면의 한계로 금융과 석유자원 관련 내용을 제외). 인명, 대부분 지명, 현지어 등은 국어 발음과 원어를 병기하여 관심분야에 대한 확장적 검색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으며, 수록된 표는 모두 번역하였다. 단 그림의 경우에는 국가와 대륙명의 경우 개발협력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여 원문을 그대로 실었다. 또한 방대한 본서의 분량을 고려하여 참고문헌은 QR코드를 통해 별도로 수록하였다. 역자가 지금껏 학문적 글쓰기를 주로 해오기도 했거니와 번역으로 인해 일부 어투가 부자연스럽게 되어 거친 표현이 남아있음은 독자가 너그러이 양해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마지막으로, 원서의 분량이 방대하기도 했거니와 역자의 사정으로 번역 기간이 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역자가 작업을 마치기까지 기다려주신 도서출판 박영사에 감사드린다. 특히 친절함과 인내심을 잃지 않고 작업을 독려해주었던 마케팅팀의 김한유 대리와 거칠고 방대한 초고를 마다 않고 여러 차례 정성스럽게 교정해준 황정원 선생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모쪼록 본서가 국내 국제개발협력의 연구와 정책의 지평을 넓히는 데 작게나마 지적 자극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2019년 10월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