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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 1902-1950

이관술 1902-1950

  • 안재성
  • |
  • 사회평론
  • |
  • 2006-08-20 출간
  • |
  • 308페이지
  • |
  • 153 X 224 mm
  • |
  • ISBN 9788956026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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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잊혀진 혁명가 이관술의 삶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나는 해방전후 역사공간

<이관술 1902-1950>은 1930년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까지 일제에 저항한 몇 안 되는 항일운동가 중 하나이자 해방 후 재건 조선공산당의 2인자였던 이관술의 일대기를 기록한 다큐멘터리이다. 이재유와 함께 경성트로이카를 이끌던 1930년대와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했던 1940년대의 대표적 국내 항일세력의 족적을 담아냈다. 이관술과 그의 동지였던 이재유, 박헌영, 김삼룡, 이현상,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었던 박진홍, 이순금, 이효정 등이 전작(<경성 트로이카>)에 비해 더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지금까지 생존한 이효정(95), 이병희(91)을 비롯해서 이관술의 유족들, 그밖에도 제자이자 심산 김창숙의 며느리인 손응교(90) 등의 증언과 유족들이 보존해온 자료들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관술 1902-1950>의 백미는 후반부이다. 후반부는 해방직후 미군정하 남한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좌·우익 갈등의 기폭점이 되었던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에 할애되었다. 당시 조선공산당 재정부장이자 총무부장이었던 이관술은 이른바 ‘정판사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다. 작가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사료들과 증언을 총동원해서 사건의 발단에서 결말까지 재현해냈다. ‘정판사사건’은 신탁통치 찬반논쟁과 더불어 해방직후 남한 내 좌익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사건이기도 한데, 지금까지도 조작여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미스터리 중 하나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논란 속에서도 체계적인 검증은커녕 이렇다 할 역사적 연구 성과조차 없는 실정인데, 이 사건의 역사적 무게로 볼 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이관술은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고,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대전교도소에서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가는 ‘정판사사건’의 조작가능성의 검증에 앞서 이관술의 복권을 조심스레 타진하고 있다. 비록 위폐범이라는 오명을 쓰고 완전히 잊혀져버렸지만 조선을 대표하는 항일투사였던 그의 경력만이라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정판사사건’의 모든 것을 책 속에 담아 독자 스스로 해묵은 미스터리를 풀어보도록 하고 있다. 더불어 현재 ‘정판사사건’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조사를 검토 중이고, 이제 이 사건의 진실이 밝혀질 날도 머지않은 듯하다.
<이관술 1902-1950>은 베일에 싸였던 해방전후의 역사공간을 당시를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혁명가 이관술을 통해 재구성하고 있다.

소설에서 역사로, 가상을 넘어 현실에 천착하는 ‘<파업>의 작가’ 안재성

-‘기록’은 나의 운명-
안재성은 ‘<파업>(세계, 1989)의 작가’로 대변되는 노동문학 작가였다. 80년대 방현석<새벽출정>, 정화진<쇳물처럼> 등과 함께 노동문학을 선도했던 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파업>으로 노동문학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90년대 중반까지 노동운동을 계속했던 작가는 청춘을 바치고 열정을 쏟았던 80년대와는 너무 다른 ‘바뀐 세상’에서 무엇을 계속하고,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한 심정이 되었다. 결국 글쓰기를 중단하고 포크레인을 배웠다. 포크레인 기사로 생활을 꾸리고 모은 돈으로 조그만 땅을 사서 농사도 지었다. 글쓰기는 무기한 유보 중이었다. 그렇게 10년을 중단했단 글쓰기를 다시 시작한 작가의 행보가 이채롭다. 신작 <이관술 1902-1950>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자. <이관술 1902-1950>은 다큐멘터리이다. 사실 작가는 가상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작품 활동을 접고 농사를 지으면서도 사적인 체험들이 넘쳐나고 자신이 겪은 ‘희망의 시대’ 80년대를 모욕하는 90년대 소설들을 보노라면 울화가 치밀었다고 말한다. 그를 대표하는 작품인 <파업>도 작가가 겪는 실화를 바탕으로 소설적인 양식을 가미했을 뿐이다. 소설을 쓰고자 한 것이 아니지만 그렇게 ‘노동소설’이라는 장르가 만들어졌다. 중단했던 글쓰기를 시작할 때도 소설을 쓸 생각은 없었다. 안재성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는 ‘기록’이다. 왜곡되지 않도록, 지워지지 않도록, 기록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록해야 할 대상에 인간의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그의 작업이 소설의 형식을 띠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베트남전쟁의 기억을 소설형식으로 쓴 <황금이삭>(삶이보이는창, 2003)에서 1930년대 국내의 대표적 항일조직이었던 경성 트로이카를 통해 식민통치 말기의 국내 항일운동의 족적을 그린 <경성 트로이카>(사회평론, 2004) 등으로 이어진 작품 활동을 봐도 작가가 무엇을 쓰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다. 신작 <이관술 1902-1950> 역시 이런 작가의 의도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앞서 밝혔듯이 이번엔 다큐멘터리이다. 물론 이 책도 소설 형식을 일부 담고는 있지만 더 많은 부분에서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역사에서 지워진 인물을 처음으로 발굴하는 만큼 작가의 생각을 섣부르게 끼워 넣기가 힘들었다. 더욱이 논란이 될 수 있는 역사를 다루는 만큼 신중해야만 했다.

-이념과 망각 속에 파묻힌 해방전후사가 이관술의 삶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난다.-
노동문학을 하던 작가가 <경성 트로이카>나 <이관술 1902-1950> 같은 넌픽션 역사물을 쓰게 된 것은 묘한 인연이 계기가 되었다. 우연히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만난 예술가 박진환(63) 씨가 경성 트로이카의 최고령 생존 멤버인 이효정 여사의 둘째 아들이었던 것이다. 경성 트로이카에 대해 알고 있었고 책으로 써보지 않겠냐는 권유도 받은 적이 있는 작가로서는 정말 뜻밖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이효정 여사를 만난 작가는 이 여사와 그의 동지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들의 투쟁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작가는 그들의 인간미에 매료되었다. 그들의 땀과 눈물, 명랑한 웃음소리와 사랑, 그리고 죽음, 그에게는 남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을 그려내기로 마음먹었다. <경성 트로이카>로 식민말기 신화적 항일투쟁가이자 노동운동가인 이재유를 재조명하고 그와 함께 경성 트로이카에서 활동했던 쟁쟁한 혁명가들을 살아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그중 한명이 이관술이었다. 경성 트로이카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그의 특이한 이력이 작가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해방 후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역사에서 지워지다시피 한 그의 비참한 말로는 가슴이 아팠다. 그러던 중에 <경성 트로이카>를 본 이관술의 유족들이 작가에게 연락을 취해왔고 이것을 계기로 <이관술 1902-1950>이 씌어지게 되었다. 인연이 계기가 되었다지만 <경성 트로이카>와 <이관술 1902-1950>은 작가의 ‘기록’에 대한 욕구의 소산이기도 하다.
1930-45년 항일민족해방투쟁의 역사는 사회주의 항일운동가들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일제의 탄압과 전향공작에 당시 민족주의 계열 항일운동은 씨가 마르다시피 한다. 경성 트로이카에 몸 담았던 많은 운동가들이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들은 너무 쉽게 와해되어 버린 민족주의 계열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이관술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후 현대일보에 기고한 회상기에서도 자신이 처음부터 사회주의자가 될 마음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단지 민족해방을 위한 길을 걷다보니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이 말이 틀리지 않음을 실감할 수 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에 투신한 수많은 사람들 역시 비슷하다. 그들은 단지 민족의 앞날을 위해 자신을 바칠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고, 민족주의와는 다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의 현실에서 사회주의 민족해방투쟁과 공산주의자들의 민족에 대한 기여 등은 역사에서 은폐되고 무시되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그러나 작가는 경성 트로이카와 이관술을 조사하면서 오로지 민족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을 단지 사상이 다르다고 해서 묻어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또 역사에 대한 판단도 과거와 현재가 다를 수 있는 만큼 역사의 지워진 부분을 다시 ‘기록’하고 다시 평가받을 기회는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금년 8·15 독립운동가 포상에 <경성 트로이카>로 재조명된 이재유, 이효정이 포함된 것은 작가의 이런 노력의 결실이다. <이관술 1902-1950>은 이관술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고증작업으로 불릴 만하며 독자들에게 새로운 문제의식을 던지는 생생한 르포다. 이를 통해 그의 전작이 그랬던 것처럼 잊혀진 걸출한 항일운동가 한 사람을 재평가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이다. 또한 이는 이데올로기에 가려진 반쪽짜리 해방전후사를 온전하게 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잊혀진 혁명가 이관술은 누구인가

해방 직후 우익성향의 단체인 선구회라는 곳에서 몇가지 항목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항목 중의 하나는 ‘가장 뛰어난 정치 지도자’를 묻는 것이었는데, 1위부터 차례로 여운형(33%), 이승만(20%), 김구(17%), 박헌영(15%), 이관술(13%), 김일성(8%) 등이 차지한다. 이관술은 김구, 박헌영과 비슷한 지지율을 보였다. 사실상 해방된 조선을 이끌 대통령을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설문조사에서 이정도의 지지를 받았던 이관술은 대체 누구인가
1902년 울릉도에서 태어나 울산에서 자란 이관술은 늦은 나이인 스물둘에 서울의 중동고교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유명했던 그는 고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당시 동경제대보다 들어가기 힘들었다는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다. 대학을 마치고 귀국해 동덕여고에서 역사와 지리 선생으로 교편을 잡았으며, 이때 제자들이 박진홍, 이효정, 이순금 등으로 후에 경성 트로이카에서 같이 활동한다. 교사생활을 하면서 민족해방의 길을 모색하던 와중 1933년 반제동맹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후 일제하 국내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신화적 인물인 이재유와 함께 민족해방운동을 이끌었다. 이재유가 1936년 체포된 후에는 1939년 김삼룡, 이순금, 이현상, 김태준, 정태식, 박헌영 등과 함께 경성콤그룹을 결성해 투쟁했고 최후까지 일제에 저항한다. 해방 후에는 재건 조선공산당의 총부부장과 재정부장을 겸했으며 박헌영의 뒤를 잇는 조선공산당의 2인자로 알려졌다. 1946년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었고,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중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식민말기와 해방직후에 조선에서 이관술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전설적인 사회주의 항일운동가인 이재유와 함께 투쟁했으며, 일제 패망직전까지 극심해지던 탄압과 전향공세에 국내 항일 세력이 씨가 마른 상황에서 끝까지 저항한 몇 안 되는 항일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던 그가 널리 알려진 것은 당연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의 안살림을 맡아 집안의 전답을 팔아치워 재정을 확보했고, 급속하게 세력이 커진 조선공산당을 정비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던 이관술은 해방 8개월 만에 다시 구속되어 다시는 철창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해방직후 현대일보에 기고했던 회상기는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라는 제목으로 씌어졌다. 비공식적인 처형으로 인해 주민등록도 말소되지 않은 그에게는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다’라는 현재형이 맞지 않을까 한다.

해방정국 최대의 미스터리,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을 추적하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다음해인 1946년 봄 미군정하 남한은 세칭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으로 발칵 뒤집힌다. 조선공산당의 기관지인 해방일보 등을 찍던 인쇄소인 조선정판사에서 조선공산당의 주도하에 100원권 위폐 12만장, 무려 1천2백만 원을 찍어 남한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려 했다는 것이다. 지금으로선 그 규모를 가늠하기가 힘들지만, 1948년 나라살림이 3000만원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엄청난 금액이었다. 주모자로는 조선공산당의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이었던 이관술이 지목되었고, 10여명의 공산당원이 연루되었다. 이관술은 한때 수배를 피해 잠적했었으나 결국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비록 관련자들이 모두 유죄 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이 사건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매우 많았다. 당시 검찰이 제시한 유력한 증거는 증거물로 제시한 위조지폐와 증인의 진술이었다. 그런데 화페전문가의 감식 결과 검찰의 증거물과 현장 검증 차원에서 조선정판에 인쇄기로 인쇄한 위조지폐가 달랐으며, 유일한 증인이었던 안순규는 고문에 의한 것이었다며 진술을 번복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는 것은 정판사사건의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안순규를 위증죄로 구속해 버린 것이다. 피고들 또한 재판 과정 내내 검찰이 제시한 진술서는 경찰의 고문에 따른 허위 자백이라고 주장했다. 고문없는 재조사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검찰이 압수했다는 위조지폐는 33장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장은 피고들이 유죄가 아닌 증거를 대라는 식의 상식 이하의 요구를 한다.
해방정국에서 날카롭게 대립하던 좌익과 우익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정면충돌한다. 좌익은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주장하며 재판정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강력하게 항의했고, 우익은 좌익의 도덕성을 비난하며 대중의 지지를 잃은 좌익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했다. 피로 점철된 좌·우익 대립의 역사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7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조작에 대한 의심이 강하게 들지만 당사자들도 이제 아무도 만날 수 없으며, 수집할 수 있는 자료 역시 매우 제한적인 이 사건은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이 난제를 풀어보려는 노력조차도 미미했다. 해방 후 한국전쟁과 빨치산으로 이어지는 민족상잔의 비극도 결국 이 미궁의 사건을 발단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진상규명조차 없었다. 지금까지 정판사사건을 다룬 역사논문은 단 한 편뿐이다. 그나마 검찰의 공식발표와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다. <이관술 1902-1950>은 이런 상황에서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의 진상을 밝혀보려는 의도에서 쓰여진 것이기도 하다.

이관술 연표

1902년 울릉도에서 태어나 다섯 살 무렵 울산으로 돌아온다.
1923년 서울 중동고교에 입학했고, 1925년 일본 동경고등사범에 입학한다.
1929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서울 동덕여고에 역사와 지리 교사로 부임한다.
1932년 가을 반제동맹을 결성해 활동하다 1933년 1월에 체포돼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34년 4월에 석방된다.
1934년 9월 경성트로이카 사건으로 체포되어 있다 탈출한 이재유를 만난다, 그 해 가을 이재유와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 재건그룹’을 만들어 활동하다 1935년 1월 조직원들이 다수 검거된다.
1935년 3월 이재유와 함께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지금의 서울시 창동 부근)에서 수재민으로 위장해 농사를 지으며,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 준비그룹’을 결성해 활동한다.
1936년 12월 하순 이재유는 일제 경찰에 체포되고 이관술은 강원도 산골을 떠돌며 피신한다.
1937년 6월 말 조직 재건을 위해 상경해 영등포 부근에 자리를 잡고 활동하던 중 이순금을 만나는 과정에서 이순금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해 대전으로 피신했다가 대구로 내려가 1년 남짓 활동한다.
1939년 1월 서울로 다시 올라온 뒤 같은 해 5월 김삼룡, 이순금 등과 경성콤그룹을 결성한다. 그해 연말 경 박헌영이 경성콤그룹에 가담한다. 경성콤그룹은 일제하 국내에서 펼쳐진 최후의 조직적 저항운동이었다.
1941년 1월 이관술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 폐병이 심해져 병보석으로 1943년 11월 가석방된다. 3개월의 가석방 기간이 끝나는 날 이관술은 고향 집을 탈출하여 1년 반 가량 은신해 있다 해방을 맞는다.
1945년 9월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중앙검열위원 및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을 맡는다.
1946년 5월 초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으로 수배되어 7월 6일 체포된다.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47년 4월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대전형무소에 수감된다.
1950년 7월 상순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이 남하하자 헌병들에 의해 대전시 산내면 골령골에서 총살당한다.


목차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 동해에서 태어나다
2. 입암리 골기와집
3. 선바위 전설
4. 중동고교에서 동경고사로
5. 동덕여고
6. 경성 여학생만세운동
7. 사회주의자의 길
8. 반제국주의 동맹
9. 경성트로이카
10. 경성재건그룹
11. 경성준비그룹
12. 끝없는 저항
13. 경성콤그룹
14. 고향에서 탈출하다
15.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
16. 통일재건 조선공산당
17. 내분
18. 조선정판사 사건
19. 체포
20. 재판
21. 반론
22. 마지막 감옥살이
23. 골령골에서 죽다
24. 벗들의 죽음
25. 흩어진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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