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머리에
서장 통신사, 어떻게 볼 것인가?
제1부 임진왜란 이후 회답겸쇄환사와 조일 국교 재개
제Ⅰ장 임란 직후 선조대 회답겸쇄환사(1607년) 파견과 대일본전략
머리말
1. 선조의 국정 운영과 ‘회답겸쇄환사’ 명칭으로 본 전후의 대일본전략
2. 선조의 비망기와 대일본통교 축소 재편
3. 1607년 회답겸쇄환사 파견과 전후처리
맺음말
제Ⅱ장 광해군대 회답겸쇄환사(1617년) 파견과 적례외교의 실태
머리말
1. 1608년 왜사의 국상(國喪) 진향 거절과 선조대의 전략 계승
2. 1617년의 회답겸쇄환사 파견과 광해군의 대일본외교
1) 일본측의 ‘오사카(大坂) 평정 축하’ 명분과 정탐외교
2) 회답겸쇄환사 명칭과 적례외교 보류
3. 회답겸쇄환사 외교와 대막부 현안 제기
맺음말
제2부 17세기 중반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동과 의외로 빈번했던 통신사외교
제Ⅲ장 인조 즉위초 후금(後金) 대비책과 회답겸쇄환사(1624년) 파견
머리말
1. 인조 즉위초 후금(後金)의 위협 고조와 병력 이동 논쟁
2. 1623년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家光) 습직 축하’ 요청과 조선의 ‘권의지책’
3. 1624년 회답겸쇄환사의 국서 전달과 ‘린호’(隣好)의 의미
1) 개작이전 인조의 회답국서와 대일본인식
2) 조선의 ‘자발적’ 통신사 파견으로 기재된 쇼군 답서
4. 회답겸쇄환사의 일본 정보와 남쪽 병력의 서변(西邊) 이동 결정
1) 회답겸쇄환사의 일본 정보와 조선의 막부권력 인식
2) 후금 대비책으로 남쪽 병력의 ‘서변’ 이동 추진
맺음말
제Ⅳ장 명・청(후금) 패권 경쟁과 병자통신사(1636년) 파견
머리말
1. ‘권시지책’으로서의 통신사외교
2.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명 사이에서
3. 일본측의 사절 요청과 병자통신사 파견
1) 국서개작사건(1635년) 이후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인식
2) 일본측의 ‘태평 축하’사절 요청과 병자통신사(1636년) 파견
4. 인조대의 국정 운영과 통신사외교 비용
5. 의례의 변경과 국서 왕복
1) 국서개작사건 이후 교린의례의 변경
2) ‘조선국왕’과 ‘일본국대군’의 국서 왕복
맺음말
제Ⅴ장 병자호란 이후 조・청 관계 변화와 계미통신사(1643년) 파견, 그리고 ‘무왜’
머리말
1. 병자호란과 조・청관계의 변화
2. 청・일간 통교 시도와 일본측 동향에 대한 조선의 대응
3. 1642년 일본측의 통신사 구두 요청과 외교의례 변경 시도
4. 1643년 계미통신사 파견과 국서의 왕복
1) 인조 국서의 ‘와카기미’ 탄생 축하
2) 이에미츠(家光) 답서에 조선의 ‘자발적’ 통신사 파견 부각
5. 인조대의 ‘무왜(撫倭)’와 통신사외교
맺음말
제Ⅵ장 명・청 교체 이후 을미통신사(1655년) 파견과 적례외교의 정착
머리말
1. 효종 즉위 이후 조・청관계와 대일본 인식
1) 조・청관계와 군비 증강
2) 대일본통교 방침으로서의 ‘무왜’와 도쿠가와
막부정권에 대한 인식
2. 1653년 ‘쇼군(家綱) 습직’ 축하 사절 요청과 전례(前例)의 계승
3. 일본측의 신례 요구와 조일 교섭
1) 쓰시마번의 ‘예조참판’ 앞 통신사 요청 서계와 ‘위식’(違式)의 수용
2) 다이유인묘(大猷院廟) 관련 요구와 절목강정
4. 1655년 을미통신사 파견과 양국 국서에 반영된 적례외교의 실태
1) 을미통신사의 파견
2) 효종 국서의 ‘쇼군 습직 축하’와 교린의 간소화
3) 쇼군 이에츠나(家綱) 답서에 세습권력 부각
5. 효종대의 통신사외교와 직교 루트
맺음말
종장
부록 _ 국서(國書)의 형식과 전달로 본 ‘통신사외교’
머리말
1. ‘왕복문서’로서의 국서
2. 통신사가 傳命儀에서 막부 쇼군에게 ‘직접’ 전달
맺음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