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여 년의 서구 문명권의 역사는 기독교사상을 품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다툼 많은 신학적 해석들은 풍성하게 생산하였으나 1세기의 복음의 현장을 문학적 해석으로 제대로 재현하지 못하였음을 나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명성이 자자한 유능한 작가들이 없어서가 아니라서 나는 늘 의문부호 하나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것이 내게 이 엄청난 모험일 수 있는, 그러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명감으로 각인되었고, 그래서 이 위험한 작업에 도전하였다.
작가생활 12년 만인 1990년에 일단 1차 도전을 하였다. 국민일보에 18개월에 걸쳐 <영원한 생애>라는 제목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형상화하였고, 연재 직후 「소설 예수 그리스도」로 제목을 바꾸어 3권의 책으로 냈다. 838면의 대작이다. 그래도 5만5천부가 팔렸으므로 내가 드디어 해냈다는 자부심이 있어 좋았다. 그로부터 30여 년 가까이 흘러 다시 읽은 나는 이게 아니라고 실망하였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겠다는 노력이 과하여 분량이 많고 매끄럽게 읽혀지지 않는 부분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다시 쓰자!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 후 30여 년을 설교하며 살아 왔다. 교회를 세 번 개척하였고, 계원예술고등학교와 계원예술대학에서 25년을 교목으로, 신학교에서 14년 강의하였다. 성경교재 「믿어지지 않는 성경 이야기 확실히 믿어지는 이야기」를 썼고, 신학교에서는 ‘신구약중간사와 신약성경의 배경’을 강의하였다. 나는 여건상 78세라는 늦은 은퇴를 하였는데, 그 마지막 3년 가까이 「제5복음서」를 다시 쓰기 위해 계원대학교회의 성도들과 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준비해 왔다. 그 후 1년 동안 주변 사람들이나 이름을 아는 모락산 자락 작은 집필실에서 하루 대여섯 시간씩 이 작품 집필에 몰입하였다. 새로 쓴 원고를 서너 번 읽으면서 너 참 잘 했다, 좋은 열매를 맺었다고 몇 번이나 독백하였다. 30년도 전에 김기영 감독과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 들은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1956년에 3시간 40분짜리 영화 <십계>의 시사회가 끝나자 ‘하나님, 이 작품이 제가 만든 게 맞습니까?’라고 감격해 하였다는 세실 B 데일 감독의 일화다.
소설은 신학도 설교도 아닌 형상화 작업이다. 복음서를 리얼하게 재구성하며 디테일로 실감나는 현장감을 연출하여 독자가 1세기의 복음의 현장을 절절하게 경험토록 해야 된다.
이 소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양한 시각으로 입체화하였다. 군중의 숫자에 예민한 점령국 로마의 총독이 파견한 잘 훈련된 정보장교의 치밀한 현장 관찰, 체포권과 기소권과 재판권까지 전권을 행사하는 대제사장 중심의 절대 종교권력 산헤드린공회가 파송한 율법준수주의자들의 엄격한 율법적 시각, 70년 가까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선민의 독립왕국을 회복하기 위해 극렬항쟁의 칼을 뽑는 열심당 조직이 주목하는 예수의 신이 된 사람이거나 사람이 된 신만의 그 무한의 능력을 그들의 독립투쟁에 활용하려는 은밀한 의도와 공작의 손길, 왕실을 공개적으로 모욕한 세례 요한의 목을 벤 헤롯 안디바 왕의 긴장한 정보원들의 시선,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제자들의 관점, 빈곤과 질고의, 나아가 은밀하게 켜켜이 쌓인 죄에 의한 신음소리로 호흡하던 참담한 흑암에서 치유와 사죄의 비길 데 없는 은혜를 입은 허다한 군상들 등의 다양한 시각을 총합, 입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형상화하였다.
몇몇 세계적 유명 작가들이 예수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썼다. 그러나 복음의 본질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수준의 허구적 서사(虛構的敍事)의 유혹에 빠져 구토증 나는 신성모독을 마다하지 않았음이 개탄스럽다. 복음의 훼손이다.
음악에서는 헨델의 <메시아>가 깊은 은혜의 감동으로 대중의 열화 같은 갈채를 받는다. 문학에서는 그렇지 못함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이 내게 있다. 문학은 여러 장르의 예술작품에 직간접 토양이다. 문학의 타락은 세상의 타락을 부추긴다. 절대가치인 진리를 감각적 흥미로 추락시키는 건 죄악이다. 진리를 모르면 아는 체 말아야 지성이다.
「제5복음서」는 성경의 4권의 복음서를 하나로 묶은 소설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 뻔한 이야기는 없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이야기이지만 소설 「제5복음서」는 같은 서사지만 구조가 다르다. 성경은 특히 복음서는 생략과 압축이 지나치다. 당시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도 외면하였다. 설명이 생략되었으며 수식어에는 무관심 수준으로 인색하다. 오죽하면 4복음서의 마지막 한 절을 ‘예수의 행하신 일을 다 기록하면 세상에 둘 곳이 없다’로 마감하였을까(요21:25).
그 압축과 복원에 의한 재구성이 이 소설에서의 fiction이다. 그러나 복음의 본질인 fact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소재요 도구로 활용하였다. 그래서 작가의 상상력과 표현력이 고뇌의 1차적 기도였고, 장편소설이 흥미와 긴장과 감동으로 전개되지 않으면 성경이 잘 안 읽히듯 이 소설도 읽히지 않는 작품으로 나의 발표작 목록에 제목 하나 추가되는 것에 머물 수 없어야 된다는 게 2차적 기도였고, 이 작품을 읽는 이마다 신분이나 상황과 관계없이 복음의 감동이 충만해지는 기막힌 은혜로 채우소서가 현재 진행형의 3차적 기도다.
2019. 8.모락산 서북 편 기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