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시인 고재종 아홉 번째 시집
‘고요’를 매개로 존재론적 성찰과 삶의 지혜 노래해
이 책은 고재종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이자 출판사 ‘문학들’이 새롭게 선보이는 시인선 첫 번째 권이다. 총 82편의 시가 실려 있다. 시인은 자서에서, “빈 고향집을 수리하여 우거 삼은 지 꽤 오래, 요사이 주위로는 적막과 침묵이 은산철벽을 치는 바, 이 시집이 그것에 대한 기록”이라고 밝혔다.
“초록으로 쓸어 놓은 마당을 낳은 고요는/새암가에 뭉실뭉실 수국송이로 부푼다” “삼베올만치나 무수한 고요를 둘러치고 앉은/고금(孤衾)의 시골집 마루”(「고요를 시청하다」).
고재종 시인의 고요가 범상치 않은 것은 그것이 ‘고금(孤衾, 외로운 이불)의 고요’이기 때문이다. 그 고요는 생의 이순을 지나 “송송 구명이 뚫리는 외로움의 골다공증과/사괘가 마구 뒤틀리는 고독의 퇴행성관절염과/바람에 욱신거리는 그리움의 신경통을 앓는” “나는 나일 것도 없다고 할 때가 오리라”(「침묵에 대하여」)고 예감하는 자의 고요이다.
놀랍게도 시인은 “손톱 자라는 소리조차 들리는 적막”의 처연함 속에서 “칠야삼경의 아궁이 속이라면/불씨 한 톨을 묻어 두던 어머니”(「처마에 등을 켜 두다」)를 떠올린다. “전교 일등 아들을 차마 공장으로 보낸 한과/그 탓에 평생을 룸펜으로 떠돈 분노” 속에서 홀로 소주잔을 꺾으며 “성성적적”(「가난의 목록을 적다」)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성성적적(惺惺寂寂), 깨어 있으면서 고요해야 하고 고요하면서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고재종 시인의 고요는 단순한 고요가 아닌 “절대고독”의 고요이며, 요란 속에 가려진 고요이자 고요 속에 숨어 있는 생기의 고요, 곧 실존의 고요라 할 수 있다. 그 실존의 안팎을 넘나드는 삼라만상을 통해 시인은 자신과 세상의 근원을 성찰하고 가야 할 길을 탐구하고 있다.
고향 마을 이야기를 담은 제4부와 송기원, 이시영, 이문구, 김남주, 김명인 등 문인들과의 애틋한 인연을 담은 제5부도 감동을 안겨 준다.
고재종 시인은 전남 담양 출신으로 1984년 실천문학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에 「동구밖집 열두 식구」 등 7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9권의 시집과 산문집이 있고 신동엽문학상,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영랑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