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원형을 찾아가는 존재론적 개진의 상상력
오현정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라데츠키의 팔짱을 끼고』는, 문헌과 풍경, 말과 글, 사막과 초원, 산록과 바다, 시와 신화와 별자리, 정치와 역사와 종교, 우주와 시원(始原), 분단과 통일, 고대와 현대, 국경과 전쟁과 혁명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커다란 스케일의 모험과 극한의 답파(踏破) 기록이다. 시인은 “햇살과 나무와 사람들은 구름으로 흐르고/ 내일의 꿈들은 상상보다 먼저 날아가”고 있는 순간을 지극한 상상력과 열정으로 담아내면서, “살아 있다는 것은/ 먼저 간 사람의 몫까지 더 멀리 깊이 가보라는 행진곡”(「시인의 말」)이라고 은유한다. 이러한 선언에서 우리는 그가 삶의 엄연한 현재성과 무한한 미래적 가능성을 함께 궁구하는 품과 격을 선명하게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오현정 시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삶의 순간마다 만나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물과 사건들이다. 시인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자들의 순간을 통해 신생과 성장과 퇴행과 소멸의 길을 예감하고 경험하고 또 새겨간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과정은 하나의 사이클을 형성하면서 존재자의 생명현상을 설명하는 시간의 매트릭스로 작용한다. 그래서 신생에서 소멸에 이르는 과정은 불가피한 존재론적 운명과도 같은 표정을 지니게 된다.
오현정의 이번 시집은 시간에 대한 경험과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서정시의 특유한 양식적 특성을 일관되게 내보이는 성과이다. 그의 시는 기억의 다양한 양상을 취택하면서 기억의 원리를 따라 삶의 근원에 대한 상상적 경험을 부지런히 치러내고 있다. 그의 시는 그리움과 따듯함을 주조로 하는 위안의 언어를 통해 기억의 원리를 수행해나가는 특성 또한 지니고 있다. 그렇게 오현정 시인은 기억과 의탁(依託)을 통한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가지면서, 시적 대상을 향한 한없는 매혹과 그리움을 노래해간다.
오현정의 이번 시집은 모든 사물이 일정한 시공간 속에서 존재하다가 그 물리적 유한성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사라지게 됨을 통해 그 어떤 현상도 순간적으로 존재했던 것에 지나지 않음을 증언한다. 우리에게 영원성이란 그리움의 대상이 될 만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부여하는 상상적 존재 형식인 셈이다. 오현정의 시에서 이러한 영원성에 대한 갈망이나 그리움의 형식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지향과는 대척적 지점에서 일종의 해체와 아이러니의 미학이 활발하게 발견되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시는 서정시가 본래적으로 가지는 근원성에 대한 탐구 의지로 충일하다 할 것이다. 결국 오현정의 이번 시집은 이러한 서정시의 근원 지향적 속성을 통해 순수 원형을 찾아가는 존재론적 개진의 상상력을 노래한 탁월한 미학적 결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