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구체적 형상화를 통해 현실을 묘사하게 마련이고, 소설에서는 인물의 행동과 서사 전개 속에 당대의 현실이 담긴다. 문학의 형상화는 이념의 틀로 단순화할 수 없는 삶의 실체를 드러냄으로써 독자에게 새로운 현실 인식의 기회를 제공한다. 고소설의 창작과 향유 또한 문학 특유의 현실 인식적 효용을 동력으로 하였을 터이다. 표방하는 바는 선악이 대조되는 도덕적인 인물 묘사와 권선징악의 서사 전개라도, 구체적 형상화의 과정에서는 그러한 관습적 인식의 틀을 벗어나는 현실의 복잡한 논리가 포착됨을 여러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덕적 인물 묘사나 서사 전개의 틀은 도리어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현실의 변화와 혼란을 더욱 생생히 형상화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국적 서사 세계나 천상계 등 초월적 서사 세계의 존재 또한 현실의 민감한 문제를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이 책은 고소설의 창작과 향유가 당대인들의 현실 인식과 대응에 기여하였을 지점을 탐색하고, 특히 고소설 특유의 이념적이고 환상적인 서사적 장치들이 당대의 현실 문제를 표현하고 소통하는 데 어떤 효용이 있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제1부에서는 당대의 급격한 사회·문화적 변화가 반영된 세 작품을 분석하여, 선악의 가치 판단이 불가능한 인물 형상과 서사 전개에서 드러나는 향유층의 혼란과 갈등을 살펴보았다. 제2부에서는 모자 관계, 부자 관계, 형제 관계 등 가족 관계의 규범을 다룬 세 작품을 분석하여 유교적 이념의 이면에 작동하고 있는 당대의 현실 문제를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제3부에서는 여성 인물들 간 성격의 차이가 두드러지는 네 작품을 분석하여, 인물들 간의 대립과 충돌을 통해 드러나는 바 당대 여성이 처한 갈등과 불안의 상황을 탐색하고 이들이 소설을 통해 소통하고자 한 삶의 문제를 들여다보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