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택 시인은 경물을 바라보면서 가족과 연인은 물론 자신이 살아가는 이 세계를 사랑하고 있다. 주관적인 감정이나 관념으로 대상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경물과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사랑을 의미화하는 것이다. 경물시는 대상에 대한 묘사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영미의 이미지즘 시와 유사한 면이 있다. 작품의 자아가 중심이 되지 않고 대상 스스로 존재성을 드러낸다는 차원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지즘 시에서의 시적 대상은 자아의 가시적인 범주로 한정된 것으로서 단순화되고 객체화된다. 객관의 기준을 시인의 눈앞에 드러난 형상 그 자체에 두기 때문에 대상은 고유한 속성을 나타내지 못한다. 시적 대상은 시적 자아에 의해 사물화된 객체, 즉 시적 자아가 주도하는 타율적인 대상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형상 너머에 존재하는 대상의 의의를 자율적으로 환기하는 경물시와는 차이를 보인다.
경물시는 작품의 자아와 대상의 관계가 유연하고 자율적이다. 상호 독립성을 지니면서 자아가 보지 못한 대상의 의미를 수용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물의 형상 너머에 존재하는 본질을 비추어보며 유기적인 관계를 갖는다. 자아와 대상이 통합이나 융합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서로 친밀하고 조화로운 서정성을 띠는 것이다. 동화나 투사를 통한 자아와 대상의 동일화를 추구하는 것과는 다르게 자아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서 대상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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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화자와 대상은 주체와 객체로 구분할 수 없다. 화자는 자신의 욕구를 위해 경물을 도구화하거나 목적화하지 않고 이물관물의 태도로 바라본다. 자아의 인위적인 개입 없이 경물의 실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경물은 화자가 바라보는 형상 그 너머에서 자신의 영역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실재 앞에서 화자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화자의 침묵이 경물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고, 경물의 침묵이 자기 존재를 숨기는 것도 아니다. 침묵이 기의를 고착시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경물의 기의를 다양하게 인정함으로써 사랑의 의미가 확대되고 심화된다.
자본주의가 심화되는 오늘의 상황에서 경물을 통한 사랑의 변주는 큰 의미를 갖는다. 자본가는 자기 자본의 확장과 권력 유지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분업화되고 기계화되고 자동화된 노동 과정에서 노동자는 공장의 소모품으로 전락되어 개성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의 상품으로 취급받는 노동자는 자신으로부터도, 사람들로부터도, 그리고 자연으로부터도 소외되고 있다. 의식주를 해결하고 문화생활을 영위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많은 정보를 소유하고 있지만 자아의 상실로 말미암아 피상적인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경물을 통해 가족애와 이성애와 사회애를 추구하는 시인의 세계인식은 주목된다. 사랑의 본질을 회복하고 사랑의 의의를 인식하고 사랑의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 맹문재(문학평론가, 안양대 교수) 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