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백에 적은 기억
모든 사물에는 그들에게만 묻어 있는 공기가 있다. 그중에서도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는 더 각별히 우리 곁에 오래 머문다. 내가 만났던 사물과 사람 들의 이야기를 적어 나갔다. 아득하다가도 가까이 다가서는 인연들. 때로는 못 본 척하고 싶은 것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내 삶에 의지가 되고 용기를 주었던 것들이다. 이들에게 살구꽃이나 딸기 향은 남아 있지 않다. 이미 나도 그런 시기를 지났으니. 그러나 여기에는 누룩과 곶감, 묵은 김치와 보리굴비 같은 오랜 풍파를 거쳐 온 시간의 냄새가 있다. 썩지 않은 삶의 냄새는 그들만의 고유한 향기다.
-「책머리에」 중에서
사라져 가는 것들을 카메라로 기록해 온 김지연의 두번째 사진 산문집이 출간되었다. 그는 앞서 나온 『감자꽃』(2017)에서 녹색 지붕의 정미소, 글자가 떨어져 나간 간판의 이발소, 마을 복덕방 같은 근대화상회 등 잊혀지고 하찮게 여겨지는 근대문화의 징표들에서 우리네 삶의 터전을 발견했다. 이번엔 사진가로 첫발을 내디뎠던 때로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남광주역이 철거된다는 소식을 듣고 시작한 ‘남광주역’ 연작, 전주천을 배경으로 대상을 특유의 쓸쓸한 색채로 담아낸 ‘전주천’ 연작 등 그는 여전히 삶의 여백에 적은 글과 나란히 시간의 세세한 무늬를 사진으로 드러낸다. “사소한 눈짓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는 나의 사진과 글을 지나가는 시간 속으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어 본다.” 그가 이렇게 포개어 놓은 책장들을 넘기며 우리는 지난날을 향한 어떤 그리움을 마주하게 된다.
남광주역, 그 첫 주소지로 가는 길
1부에서는 세월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풍경과 이야기를 담았다. 구십년대 말, 나이 오십에 사진을 시작한 김지연은 이른 아침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전주에서 서울까지 사진을 배우러 다니는 열성을 가족들도 말릴 순 없었다. 작은 방에 검은 막을 치고 인화하는 일은 수없이 반복되었고 그만큼 그가 카메라로 담아낸 것들도 늘어났다.
이렇게 사진을 시작하고 그가 한 첫 작업은 널리 알려진 ‘정미소’ 연작이 아니라, ‘남광주역’이었다. 1999년 여름 한 지방신문에서 곧 남광주역이 철거된다는 기사를 보고 충격을 느낀 그는, 오랜 시간을 거쳐 온 것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을 붙잡는 유일한 수단이 사진임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고 한다. 남광주역은 1930년 신광주역이라는 경전선 열차로 시작, 1938년 남광주역으로 이름이 바뀌고 담양, 화순을 거쳐 여수까지 운행했다. 이 역은 새벽 동트기 전부터 여덟시 반까지 열리는 역사 앞 도깨비시장이 유명했는데, 장성, 화순, 남평에 사는 ‘아짐’과 ‘할매’ 들은 집에서 가꾼 채소와 먹거리를, 멀리 여수, 벌교, 보성에서는 해물 보따리를 새벽 기차에 바리바리 싣고 들어왔다. 경비원의 호각소리에 난장판이던 장터는 말끔히 정리되고 경비원이 싸리비로 역사 앞마당을 쓸어내면 아홉시가 된다. 그렇게 도깨비시장이 파하고 나면 빈 보따리를 챙겨 든 할머니들은 남광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갔다. 마지막 날도 평소처럼 장이 서고, 무뚝뚝한 역장과 두 명의 역무원은 못 이기는 척 역사 앞에서 사진 한 장을 남기고, 2000년 8월 10일 남광주역은 폐역된다. 이런 사연들과 함께 사진이 담담하게 이어지며 뒤안길에 접어든 비디오대여점 「제광비디오」와 기계 없이 손으로 반달 떡을 만드는 「우량제분소」까지 천천히 소외되어 가는 스산한 풍경을 포착해낸다.
2부는 김지연 특유의 관찰과 일상에 대한 사유가 돋보이는 글들을 묶었다. 「함께 산다는 일」에서는 앞마당에 숨어 사는 새끼 고양이들을 모른 척하다가도 고물거리는 생명이 눈에 밟혀 물그릇을 챙기는 의외의 면모를 만날 수 있다. 「석 대의 선풍기」에서는 에어컨이 없는 전시장에서 고군분투한 선풍기들에 감사를 잊지 않았던 저자가 베란다에 아무렇게 놓여 있는 선풍기들을 보며 지난여름의 더위를 떠올린다. 작고 초라한 힘으로 한여름을 막아냈을 노고를 새삼 고마워하며 측은한 감정에 휩싸인다.
이 책은 동시대의 역사인 동시에 사진가 개인의 역사이기도 하다. 소소하고 꾸밈없는 이야기들이 담겼던 전작 『감자꽃』이 품고 있었던 특징이 올올이 드러나 있다. 조금 다른 지점이라면 언제나 바삐 우리 곁을 가로지르던 대상이 ‘움직임을 멈추었다’는 슬픈 동시성에 기인한다. 김지연은 움직임과 멈춤에 주목한 데서 그치지 않고 사라진 역사에서 다시 출발시킨다. 본래의 기능을 잃고 쇠락해가는 역사의 순간에 닿았을 때 현재와 연결된 다리의 실체가 드러난다. 과거와 나와의 여행, 그의 사진이 우리에게 주는 고유성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사실 이번 사진 산문의 중심이라고 할 ‘남광주역’은 전라선과는 다른 경전선이고 오히려 호남선 쪽에 가깝다. 그럼에도 책 제목을 호남선이나 경전선이 아닌 ‘전라선’이라고 한 것은 전라도와 열차가 결합된 이미지를 의도한 것이다. 또한 글 「전라선」 속 ‘나’의 모습은 작가의 젊은 시절의 지독한 아픔, 그것을 알아준 친구의 믿음, 그 덕에 오늘의 그를 있게 해 준 힘을 상징한다.
책끝에는 김지연의 전시를 2012년부터 2017년까지 매년 열며 특별한 인연을 맺은 박미경 류가헌 관장의 발문 「‘부덕이’가 기어이 할아버지 옛집으로 돌아갔듯이」가 실려 있어, 사라져가는 기억을 소환해내는 그의 사진과 글에 함께 힘을 보탠다.
한편 책에 실린 ‘남광주역’ 연작을 다룬 「남광주역, 마지막 풍경」전은 2019년 6월 5일부터 8월 18일까지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린다. 전시 오프닝 행사는 6월 12일 오후 5시 광주시립사진전시관에서 있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