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한 언어와 추억의 색채가 잘 버무려진, 여운이 깊은 시들
2017년 『문예사조』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하재숙 시인이 첫 시집 『무성히도 넘실거렸다』를 출간했다. 하재숙 시인은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졸업 후 서예, 서각, 목판각, 판화 등을 배웠으며 중앙일보 『계간 미술』에 입사해 잠시 잡지 일을 했고 한국미술협회 서양화분과 회원으로 오랜 창작 활동을 해왔다.
하재숙 시인의 시세계는 조촐하리 만큼 담백하고, 정갈하게 속이 비치면서도 주변의 사물들을 쉼 없이 끌어들여 서로 호응하게 하는 시어들을 든든한 바탕으로 전개된다. 이런 시어들의 무늬와 질감이 의미 형성에까지 이어진다. 시인이 자서(自序)에서 말한 “나만의 색채와 톤은 잘 갖추었는가/ 나의 체취는 살아서 가닿는가”라는 질문은 자기 성찰을 통해 자기 지향을 드러내는 ‘역설의 방식’이다.
화가이자 시인인 하재숙은 추억을 그린다. 언어와 추억의 색채가 버무려진 시들은 선명하고 여운이 깊다. 시 「이사할 때」를 보면 시인의 단출한 삶이 엿보인다. 찰그랑 소리를 내는 현관의 대나무 문발과 신발장 위 물 담긴 질항아리 뚜껑에 놓인 꽃 한 송이. 짧은 복도에 늘어놓은 미술 작품 서너 개를 지나면 안방에 ‘파랑 내 초상화’가 걸려 있고 침대 옆에는 비닐에 인쇄된 통일신라 김생의 글씨도 있다. 이사할 때마다 가져가는 그 추억 어린 사물들. 빠뜨리지 않고 챙겨가는 그 사물들처럼 시인은 자신의 가슴 안에서 늙지 않는 기억을 추억의 물감으로 그려간다.
그 중 몽골 테렐지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보며 군대 가서 사고로 죽은 외사촌 오빠가 손가락 끝으로 몇 개의 별자리를 찾아주던 추억을 떠올리는 맑은 사랑의 시(「테렐지에서」)는 가슴을 저리게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경험하지만 하재숙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사는 것은 앞으로 이사를 몇 번 더 하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고, 그때마다 가져가는 몇 개의 소박하지만 소중한 사물과 추억이 전부일 것이다. “서로의 밥에 설켜 있는 줄”(「밥값」), 그 인연의 줄을 섬세하고 맑게 풀어나가는 시인에게서 선하고 맑은 단출한 삶과 추억의 소중함을 배우게 된다.
하재숙 시인은 화가답게 빛과 색채에 민감하다. 그래서인지 그는 기억을 역광에 배치함으로써 시간을 뚫고 살아나는 입체적 감각으로 되살리고 있다. 시적 계기로써 기억의 힘을 보여주는 이번 시집에는 또 하나의 비감하고 숭고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늦게 시작해서 더딘 걸음이라 평가받을지라도 시작에 임하는 그의 진정성이 오롯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 그래서 개인 역사의 기록으로서 ‘출사표’ 같은 의미를 갖는다는 점이다. 하재숙 시인은 역광으로 비추는 시론, “아는 것만을 쓰고 경험한 것만이 진실에 가깝다”를 주목한다. 이 말은 뒤집으면 ‘앎과 경험에의 열정’이 곧 진정한 생의(生意)이고, 시작의 원동력이라는 말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