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선교기관이자
독립운동의 전진기지, 세브란스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의전은 기독교 선교기관으로서 독립운동의 전진기지였다. 기독교계의 지도적 인사들은 세브란스병원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관한 논의를 본격화했으며, 세브란스의 교직원·의학생·간호부 등은 자신들이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우선 이갑성 등을 비롯한 교직원들은 독립운동의 방향 설정, 정보수집 및 선전활동 등을 수행했다. 이갑성과 함태영 등은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운동을 조직화했고, 학생들과의 연계를 통해 3·1운동의 전국화에 기여했다. 교직원들 중에서 외국인 선교사들의 역할 또한 작지 않았는데, 알프레드 샤록스와 스코필드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의학생들은 학생 YMCA 조직을 통해 독립선언서를 전국에 배포하고 가두시위에 참가하는 등 3·1운동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자신의 고향을 중심으로 독립선언서를 배포했고, 만세운동과 관련된 정보를 지방으로 확산했다. 간호부들은 가두시위 참가 이외에도 수감자 지원, 독립운동자금 모집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정신여학교 출신들은 견습간호부로 활동하면서 3·1운동에 참여했는데, 간호부들의 독자적인 만세시위와 독립운동자금 모집은 동원이나 조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참여였다는 점에서 세브란스인들의 독립운동의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독립운동을 향한 세브란스인들의 열기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으로 이어졌다. 임시정부에서 활약했던 대부분의 의사들이 세브란스 출신이었다는 점은 더 이상 놀랄 일이 아니다. 주현측·신창희·신현창 등은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등에서 활약했으며, 곽병규·정영준·김창세 등은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대한적십자사 간호부양성소에서 간호교육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세브란스병원이나 의학교는 독립운동을 위해 설립된 기관이 아니었음에도, 군대 강제해산 이래로 일제의 강제병합과 식민통치하에서 독립운동의 산실로서 기능했다. 세브란스인들이 대거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 데에는 3·1운동이 기폭제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특히 3·1운동에는 교수·학생·간호사·직원 등 세브란스의 다양한 직군들이 참여했는데, 의료기관 종사자들이 대거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례이다.
제중원 창립 이래로 제중원·세브란스인들은 사회적 리더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고등교육의 수혜자로서 일신의 안일을 내던지고 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 세브란스는 일제강점하의 핍박 속에서도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전재민구호병원, 전시구호병원, 4·19혁명, 유신반대운동, 6월 항쟁 등 전시구호와 민주화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세브란스인들은 언제나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고 시대적 사명을 회피하지 않았으며, 선각자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나갔다.
세브란스인들이 이처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의료인으로서의 소명에 보다 충실하기 위한 또 다른 차원의 실천이자, 불의에 항거하고 인간의 구원을 목표로 하는 기독교 정신을 실현하려는 뜻깊은 노력이기도 하다. 이 책이 단순히 운동에 기여한 한 기관의 역사를 정리하는 차원을 넘어, 오늘날 이 땅에서 의료인의 참된 소명을 고민하는 많은 의료인들에게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