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맛은 어떤 산해진미보다도 더 맛있다. 심지어 마약보다 더 심한 중독성을 지닌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극단적인 가치를 지닌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권력을 추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가치이자 평가로 한정할 필요는 있다.
누구나 권력을 추구하지는 않으며 권력의 획득이라는 기회 자체가 누구에게나 주어지진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기회가 주어졌을 때 과연 누가 그러한 기회를 거부할 것인지, 또는 과감하게 권력의 달콤함을 차버릴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 남아 있다.
더구나 인류 역사상 모든 지도자들이 폭군은 아니었다. 극히 일부분의 지도자들이 잔혹한 폭군의 멍에를 지고 있을 뿐이다. 그와는 반대로 성군(聖君)으로 존경 받는 지도자들도 상당 수 존재한다. 폭군과 성군은 양극단에 서 있는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성군이 되기도 폭군이 되기도 쉽지 않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대다수의, 최소 절반 이상의 지도자들은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국가를 운영해 온 것으로 평가해도 지나치지는 않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폭군과 성군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작용하는 가장 큰 요인은 당사자 자신의 인성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환경이라 할 것이다. 그때의 시대적 환경과 함께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폭군의 인성이 변화될 수밖에 없는 환경요인이 조성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폭군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몇몇의 성인들에게서 나타나는 극고의 인간승리를 조명해볼 때 모든 인간이 환경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거나 굴복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할 뿐이다.
절망과 좌절을 이겨내는 것도 인간의 특권에 해당한다. 마냥 환경 탓, 남의 탓만을 주장하며 거세게 항의한들 누가 완벽하게 그 상황을, 그 환경을 극복하고 개선할 수 있을 것인가? 세상이 그리 만만하진 않다.
본문 요약
최근에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한 지도자가 그랬다.
”내가 곧 국가다”
이는 곧 폭군은 권력의 산물이다로 정의할 수 있다고 본다.
이 말은 17-8세기 프랑스 절대주의 국가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루이 14세로부터 연유된 말이다. 그런데 기껏 천황을 신성시하는 국가의 일개 총리가 이런 망발을 자행하다니, 과연 그의 정신상태는 어떠할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다.
겨우 4년간 통치했을 뿐이지만 갖가지 기행(奇行)으로 잔혹하고 가학적이며 극단적인 과시욕에다 변덕스러운 성적 도착자라는 수치스러운 오명을 후세에 남긴 한마디로 ‘미치광이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는 로마 역사상 희대의 폭군이라는 칼리굴라(Caligula)로부터 “황제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리” 라며 마음껏 폭정을 행사한 로마의 섬세한 폭군 네로(Nero)는 너무나 유명한 황제이자 폭군이었다. 권력이란 그만큼 마약보다 진한 중독성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코모두스, 카라칼라, 포카스, 무솔리니, 히틀러, 이반 4세, 스탈린, 루이 14세 등 열거하기 벅찰 정도로 많은 폭군들이 존재한다.
동양에도 칼리굴라와 네로 못지 않은 폭군이 있다. 중국 최초의 황제이자 폭군인 진시황, 하(夏)의 걸왕(桀王), 은(殷)의 주왕(紂王), 수(隋)의 양제(煬帝)로 하여 고구려의 대표적 3폭군인 모본왕, 차대왕, 봉상왕, 그리고 연산군과 광해군에 이르기까지 말로 형언하기 힘들만큼 잔혹한 짓을 서슴지 않았던 폭군들이 그 시대의 백성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가히 집중된 권력의 극단적인 폐혜이며 잘못된 지도자로 인해 수백만, 수천만의 국민들이 피해를 본 역사의 교훈이라 할 것이다.
현 시대에도 여전히 폭군은 존재한다.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