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ace
테크놀로지 기반 학습 혁명은 디지털 콘텐츠의 공급 측면에서 시작되었다. 한계 생산 비용이 제로로 수렴하는 디지털 콘텐츠의 특성으로 인해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무료로 다양한 콘텐츠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콘텐츠의 공급 부족으로 인한 학습 부진 현상은 더 이상 이 시대의 사회적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학습 용량을 넘어서는 콘텐츠 과잉 공급에 있다. 배울 대상은 넘쳐나는데, 배울 주체의 인지적 병목 현상은 해결해야 할 시대적 과제가 되었다. 이는 동시에 학습 콘텐츠 개발자로서 교육공학도가 누리던 독점적 지위가 위협 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테크놀로지 기반 학습 혁명은 과잉 공급되는 콘텐츠 중에서 무엇을 골라 어떻게 소비할 것이지를 끊임없이 판단해야 하는 학습자를 돕는 테크놀로지에 의해 완성될 수 있다. 교육공학이 맞이한 시대적 과제는 학습자의 제한된 시간과 인지 처리 용량을 여하히 최적 배분하여 지식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창조적 역량을 갖추도록 할 것인가로 모아진다.
교육공학은 “적절한 공학적 과정과 자원을 창출하고 활용하며 관리하여 학습을 촉진하고 수행을 향상시키려는 연구 및 그 윤리적 실천”이다. 그간 교육공학의 주된 주제였던 교수설계 활동은 주로 ‘자원 창출’, 즉 콘텐츠 공급 측면에 집중되었다. 이에 비해 공급된 콘텐츠가 학습 장면에서 ‘학습자에 의해’ 소비되는 ‘과정’을 ‘윤리적으로’ 관찰하고 그 결과 ‘수행 향상’을 객관적으로 엄밀하게 탐구하지 못했다. 공급 중심 교육공학에서 소비 촉진 교육공학으로 변신하지 못한다면, 교육공학은 조로할 것이고 끝내 젊은 나이에 요절할 지도 모른다. 학습분석학은 테크놀로지 기반 학습 혁명을 완성하고 우리의 학문적 정체성을 균형 있게 정립하기 위해서 필요한 도구이다. ‘콘텐츠’와 ‘결과’에서 ‘학습자’와 ‘과정’으로 교육공학의 실천 지평을 넓혀가기 위해 ‘교육공학에 맞는 학습분석학’을 개발하고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 지점에서 힘을 얻는다.
이 작은 책은 이화여자대학교 에듀테크융합연구소가 수행해 왔던 생리심리 데이터 기반 학습분석학 연구 과제 수행 과정에서 전공 대학원생들이 직접 경험한 사례를 동학들과 공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경험의 귀납은 완벽한 논리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 그러나 우아하고 완벽한 연역은 이 세상에 유용한 지식을 생산할 수 없는 불임의 사유이다. 재론컨대 이 책은 경험에 기반한 유용함을 향한다. 설문 조사, 처치-대조 실험 등 기존 연구 방법론 교과서에서 다루지 않는 절차와 기법, 양식과 코드, 사진과 다이어그램 등 실제 사용된 자료, 그리고 IRB 인증, 피험자 모집, 장비 세팅, 실험실 환경 통제, 데이터 전처리, 생리데이터의 심리적 해석 과정 등 우리가 구안한 절차 등, LAPA 연구 수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차들을 담고자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에 ‘방법의 이론’인 방법론(methodology; method+logos) 의 정립을 추구하지 않았다. 학습자와 그가 처한 학습 상황이 각각 다르다면 이를 분석하는 학습분석학 또한 달라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의 목적은 에듀테크융합연구소의 생생한 맥락 속에서 현상했던 방법들(emerged methods)을 동학 앞에 드러내는 데 있었다. 이 책의 쓰임새는 읽고 이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적용하고 성찰해서 독자의 연구 맥락에 맞는, 더 유용한 a new method를 만드는 촉매제가 되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저자들의 지도교수로서 나는 이 책이 유독 소중하다. 여기 담긴 그림, 양식, 일정표, 코드를 볼 때마다 이를 만들어낸 제자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Leading edge is bleeding edge”라는 말이 있다. 나는 학습분석학이 교육공학의 leading edge라고 지금도 확신한다. 그러나 나의 확신이 가리키는 그 길을 걷기 위해 나의 제자들은 남다른 고민과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들의 앞길을 이끌기에 경험과 역량이 부족한 지도교수로부터 변변한 도움도 받지 못했음에도 끝내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에듀테크융합연구소 졸업생과 재학생, 그리고 미래의 제자들 모두에게, 감사와 위로의 마음으로 이 책을 바친다.
2019년 2월
조일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