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년의 그림이 펼치는 연금술,
한 예민한 시인이 나직하게 노래하는
세상의 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시인의 펜 끝이 예민하다. 사각거리는 그것이 밤의 대기를 휘적거린다. 생의 희로애락을 은유한 그림들, 시인의 눈길을 사로잡은 그것들에서 고요하고 나직한 밤의 선율이 흘러나온다. 놓칠세라 시인의 펜이 부지런히 받아 적는다. 잊히거나 지워져서는 안 되는 노래들. 부단히 생의 비의를 탐색한 흔적들. 이 책은 73편의 그림들과 짝을 이루는 시적 에세이로 꾸며져 있다. 유달리 시인의 그림 사랑이 두텁고 각별하달까, 그래서인가 지면 곳곳 시인과 그림이 나눈 교감의 깊이가 웅숭깊다.
“추적자를 따돌리느라 무진 애를 먹었으리라. 젖 먹던 힘을 다해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덤불숲을 내달렸으리라. 쓰러질 듯 기진맥진해져서야 그는 겨우 사지에서 벗어났다. 꿀맛처럼 다디단 옹달샘에 목을 축이며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이럴 때 날카로운 뿔이 이마 위에 필요했으나 그러려면 더 자라야 했고, 완벽한 사냥꾼으로서의 자격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몇 달을 더 바람처럼 울울창창한 숲길을 방황해야 했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자랐으며 앞으로도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의 위기와 탈주는 자신의 앞날에 새겨두어야 할 값진 교훈이 되리라.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주변을 살폈으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새소리는 아름답도록 평화로웠으며 줄지어선 아름드리나무들은 고요하고 적막하며 빽빽했다. 이젠 잃어버린 아비어미와 형제들을 찾아 나서야 할 시간, 그는 뿔뿔이 흩어진 식구들의 냄새를 좇아 코를 벌름거렸다. 그러곤 겁에 질려 있는 자신의 영혼을 토닥거리며 용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지칠 줄 모르고 솟아오르는 옹달샘에 겹겹의 파문을 그리며 몇 모금의 생명수를 혓바닥 깊숙이 적셔두었다.” (본문 35쪽, <뿔이 돋기 전> 전문)
누가 먼저 말을 건 것일까. 시인이 그림을 깨우자 그림이 조용히 화답했을까. 아님 그림이 먼저 시인의 상상과 영감을 촉발했을까. 누가 먼저인지 모르지만 둘이 조응해 부르는 노래가 예사롭지 않다. 그로써 세계의 만상이 부각되며 새로운 의미의 서사가 태어난다. 시인은 말한다. “어떤 그림은 가슴을 벅차게 한다. 들여다볼수록 눈이 즐겁고 더없이 행복하게 한다. 때론 그것이 평온과 안식과 고요의 길로 이끌어주지 않던가. 하지만 저들과 대면하며 번번이 기쁘거나 즐거웠던 것만은 아니다. 어떤 그림은 처절히 고뇌하게 한다. 분노하거나 탄식하거나, 한아름의 눈물과 격정을 안겨주기도 하며, 절로 서사적 독백이 솟구쳐 탁자에 엎드려 무언가를 기록하게 만든다”고.
총 73편의 그림과 나눈 곡진한 이야기들. 세간에 흔하게 알려지지 않은 다수의 그림들을 처음 접하게 되는 기쁨도 크다. 그야말로 시인의 언어가 노래가 되어 비상하는 환상적인 연금술의 시간. 누구보다도 예민해진 펜으로 시인은 세상의 밤을 읽는다. 재잘거리는 그림 속의 말들을 업고 고요히 밤길을 걷는다. 그의 기억들이 자아낸 한 줄의 문장이 운명처럼 그림의 안팎을 넘나든다. 그가 복원한 밤이 고요의 앙금을 가라앉힐 때까지, 혹은 그가 저 밤의 숲가에서 잃었다는 문장의 한 단어를 찾을 때까지 우리를 흠뻑 그의 밤 노래에 젖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