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순조 시대를 살아간 문신 서형수의 호는 명고(明皐)로, 대제학을 지낸 서명응(徐命膺)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숙부 서명성에게 입양되었으며, 35세(1783, 정조7)에 증광 문과에 급제했다. 숙부 서명선(徐命善)이 정조의 즉위 과정에 세운 공으로 인해 특별한 지우(知遇)를 받은 한편, 정조의 즉위를 방해하려던 홍계능(洪啟能\)의 제자라는 이유로 출사 전후에 몇 차례 탄핵을 받기도 했다. 1805년 김달순(金達淳) 옥사―사도세자(思悼世子) 대리청정 시에 학문 정진과 정사의 근면 등을 간언(諫言)했던 박치원(朴致遠)․윤재겸(尹在謙)을 표창해야 한다고 주장한 김달순으로 인해 불거진 옥사―에 연루되어 1824년(76세) 별세할 때까지 19년 동안을 유배지에서 지냈다.
명고의 문장은 청(淸)나라 서대용(徐大榕)으로부터 당송팔대가 중 하나인 유종원(柳宗元)의 솜씨라는 평을 받았고, 학문은 주자학적 사유에 발을 딛고 있으나 그에 갇히지는 않았다. 시 창작의 배경과 의미 맥락에 주의하여 《시경》의 시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노력으로 《시고변(詩故辨)》을 저술하는 등 고증적인 학문 방법과 정신을 수용하였다. 조선 학문의 폭과 체계가 일신되던 시대 그 현장의 중심에서 개방적인 태도로 기윤(紀昀) 등 중국의 석학들과 교유하며 정조(正祖)의 의욕적인 도서 구입에 조력한 인물로, 진취성과 신중함이 아울러 돋보이는 학자․문인이다.
서형수의 시문집《명고전집》은 20권 10책으로 현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시(詩)와 서(書)를 비롯해 소(疏)와 계(啓)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시 <명고팔영>은 저자가 살았던 명고정사(明皐精舍)의 주변 전경을 묘사한 명시이고 <무산십이봉>은 중국 연경에 갔을 때 무산 풍광을 보고 묘사한 뛰어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