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가 전기를 바친 유일한 문학인 루셀
사후 30년 만에 되살아나 오늘날 작가들의 신화가 된 전설적 인물
1933년 팔레르모의 한 호텔에서 유언장과 더불어 주검으로 발견되기 전까지, 레몽 루셀은 작품을 발표하는 족족 세간의 야유와 조롱에 휩싸여 신경증에 시달리던 무명 작가였다. 막대한 유산 덕에 감히 상상도 못할 사치와 풍요로 제 인생 자체를 초현실적 작품으로 가꿔낸 희귀 작가 루셀. 세상은 그가 죽은 어머니를 방부처리하고 관뚜껑에 유리창을 내어 마지막 순간까지 두고두고 그 얼굴을 봤다든가, 로마를 지날 때면 교황과 무솔리니마저 혹할 정도로 살롱과 침실과 부엌은 물론 운전수와 하인들 방까지 갖춘 대형 캠핑카 같은 이동식 주거차량을 끌고 다녔다든가, 동성애자 정체성을 눈속임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죽기 전까지 샤를로트 뒤프렌과 어딜 가든 동행했다든가, 세상에 없는 글자 하나를 인쇄해내기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식자공에게 지불해 책을 제작하게 했다든가 하는 것들에 더 눈을 흘겼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그는 생전에 어느 누구보다 문학에 제 삶을, 정신을, 부를 탕진한 작가였다. 초현실주의자와 다다이스트, 누보로망 및 울리포 작가들, 구조주의자와 해체주의자들에게, 루셀의 작품은 영감과 사유의 촉매제였다. 일례로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걸 만들어낸 루셀. 나는 내 정신의 도서관에 루셀 전작을 구비해두려 한다”고 말한 마르셀 뒤샹은, 1912년 연극으로 각색된 〈아프리카의 인상〉을 앙투안극장에서 본 후 이 작품에 영감받아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라는 일명 ‘대형 유리’ 추상화 설치작품을 제작했다.
하나 루셀이 되살아난 건 사후 30년이 지나서였다. 『아프리카의 인상』(1909) 초판이 다 나가는데 22년이 걸렸다며 자조하던 루셀이 1933년 죽고, 1963년 미셸 푸코가 평전 『레몽 루셀』을 출간하면서 컴컴한 무명 속에 있던 루셀의 책들이 재출간되는 기염을 토했다. 루셀이 자신의 문학세계에서 펼친 새로운 ‘기법procédé’이 문학작품과 글쓰기의 기원을 ‘언어’에 두고 있음을 살핀 푸코의 글 말고도, 앙드레 브르통, 미셸 뷔토르, 쥘리아 크리스테바 등 여러 문인이 루셀의 문학세계에 매혹당해 글을 썼다.
그렇다면 오늘날 문학사에서 여러 예술가와 철학자를 매료시킨 신화적 인물로 남은 이 작가의 글쓰기는 어떤 것일까? 그전에 먼저 한국어판의 특징을 소개한다.
대표 걸작과 작가 사후에 인쇄된 비밀한 창작론을 함께 묶은 한국어판
"나는 늘 내 책 몇 권을 어떤 방식으로 썼는지 설명하고 싶었다.
그것은 매우 특별한 기법이다. 그 기법을 밝히는 게 내 의무라는 생각이 든다. 미래의 작가들이 어쩌면 그 기법을 활용하여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레몽 루셀.
루셀은 도대체 무슨 대단한 방법으로 글을 썼길래 이런 말을 했을까? 그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인쇄업자에게 절대로 자신의 창작기법을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았다. 그래서 그의 비밀한 글쓰기 ‘기법’이 담긴 글 『나는 내 책 몇 권을 어떻게 썼는가』는 1933년 그가 죽고 나서 2년 후, 1935년에야 발행되었다. 미래의 작가들도 이런 창작기법을 활용해 성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고 권하는바, 도대체 어떤 기법일까.
이 책 한국어판은 말 그대로 그 기법을 활용한 성과들 중 루셀의 대표 걸작으로 꼽히는 『아프리카의 인상』(1909)과 그 글쓰기 기법이 소상히 적힌 『나는 내 책 몇 권을 어떻게 썼는가』(1935)를 함께 묶은 판본이다. 국내 처음 소개되는 글들로, 이번 판본을 기회로 삼아 한국 독자들은 그간 푸코나 블랑쇼나 뒤샹 등 유명인사들의 휘황찬란한 말 속에서 전설처럼 들려오던 루셀 문학세계의 아우라를 구체적인 독서로 체험해볼 수 있게 되었다.
꿈 공화국의 언어기계 루셀의 성공적인 실험작
한 문장 한 문장 ‘기법’에 따라 제조된 서사문학의 신화 『아프리카의 인상』
“나는 많은 여행을 했다... 그런데 이 모든 여행에서 내가 내 책을 위해 끌어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보기에 이 사실은 말해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게는 상상력이 전부라는 사실을.”(본문 376쪽)
루셀은 창작 이전에 창작기계를 먼저 제작한 발명가라 할 수 있다. 또는 자기의 생명 일부를 떼내어 자라게 배양해놓은 실험실의 과학자 같기도 하고, 철자나 단어를 수처럼 취급해 수학공식을 놓고 값을 구하듯 다음 문장을 써내는 걸 보면 영락없는 수학자 같기도 하다. 그가 고안해낸 ‘기법’은 일종의 글쓰기 메커니즘을 가동시키는 손쉬운 쓰기기계다. 크노가 말했다시피 “상상 속에서 시인의 합리성과 수학자의 열정을 결합”할 줄 알았던 작가. 빌라-노마드 즉 유랑용 주거차량에서 떠돌며 글을 썼던 루셀에게 진짜 아프리카나 아프리카의 인상 따위는 그러므로 중요한 게 아닐 수 있다. 그렇게 언어기계를 상상 속에서 돌려 한 문장 한 문장 뽑아내다보니 『아프리카의 인상』 이야기가 완성되었으니까.
작가가 밝힌바, 『아프리카의 인상』은 거칠게 말하면 ‘두 단어’에서 나온 대작이다. 「흑인들 사이에서」라는 단편소설에서 쓴 기법이 확장과 변주를 통해 긴 서사로 이어진 것. 일종의 메타그람(철자바꾸기놀이)을 활용한 소설 제조다. 즉 ‘billard(당구대)’와 ‘pillard(약탈자)’라는 철자는 매우 비슷하나 뜻이 다른 두 단어를 놓고 짧은 문장 두 개를 쓰면서 출발한다. 그렇게 해서 ‘billard’가 들어간 문장에서 시작해 ‘pillard’가 들어간 문장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상상해낸다.(구체적 예시들은 357쪽 이하 『나는 내 책 몇 권을 어떻게 썼는가』에 나와 있다.) 이렇게 단어에 단어, 문장에 문장이 나붙는 이야기를 상상해나가면서, 루셀은 어마어마한 공과 시간을 들여 작품을 완성한다. 한 단어에 새로운 단어를 끼웠다 뺐다 하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그 모습이 새로운 발명품을 실험하는 정교한 기계제작자 같다. 그래서일까. 세상에서 지시대상을 찾을 수 없는 낯선 존재나 사물, 전혀 색다른 풍경이나 희한한 기계들이 등장한다.(암소 허파로 만든 레일, 뚜렷한 그림들을 보여주는 흰색 식물성 스크린, 물속에 던지면 영상이 나타나는 푸른색 봉봉, 거무스름한 음식을 먹은 황후들의 트림 합주, 처형당한 목에서 철철 흐르는 피를 빨아들여 단숨에 혈액을 응고시키는 단두대 나무, 사람을 들어올리고도 남을 정도로 접착성이 뛰어난 침을 지닌 설치류, 몸에서 물방울을 흘려보내 치터를 기막히게 연주해내는 벌레, 재미난 이미지가 담긴 포도알 등.)
이 전대미문의 작법으로 탄생한 산문소설 『아프리카의 인상』은, 문학에 대한 광기 어린 그의 집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보다 더한 일례로, 괄호 안에 또 괄호를 쓴 중첩괄호로 써나가면서 본문과 각주마저 운율과 각운을 맞춰 12음절 시구로 쓴 장시 『새로운 아프리카의 인상』은 그야말로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창작물을 내놓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한 행 제작에 평균 열다섯 시간, 족히 7년이 걸렸다니 말이다.) “하늘과 땅을 머리에 인 상상력”이라고 상찬한 엘뤼아르도, “꿈 공화국의 대표”라고 한 아라공도, “극도로 부지런한 의식적 인간이 극도로 맹렬한 무의식적 인간과 실랑이하기를 그치지 않는다”고 한 브르통도, 모두 이 꿈같은 언어기계조작자 루셀의 상상 필드에 심히 경탄과 재미를 느꼈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렇다면 걸작 『아프리카의 인상』은 어떤 내용일까.
『아프리카의 인상』의 줄거리와 구성
1909년에 발표한 이 장편소설은 총2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상 세 부로 나눌 수 있다.
1부(1~9장)에서는 6월 25일 오후 4시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아프리카 어느 해안도시의 트로피광장을 중심으로 그 일대에서 진행되는 흑인 황제 탈루의 대관식과 축하공연이 서술된다. 연극무대에서 기예공연 장면이 지나가듯 독자에게 아무 인과관계 없이 그저 나열된다.(바로 뒤 2부에 나오지만, 탈루는 막 오랜 숙적인 남쪽 나라의 왕과 싸워 이겨 땅을 통일함으로써 대관식에 올랐고, 축하공연에는 온갖 기예와 낯선 기계장치의 운동 및 실험 장면 등이 펼쳐진다. 좌초된 배 랭세호에서 내린 유럽인 포로들은 황제에게 몸값을 요구받았고 그 값을 받으러 파견나간 세일코르가 돌아올 때까지 무료함을 달래고자 '탁월한 자들의 클럽'이란 걸 만들어 공연행사를 준비하는데 그와 관련한 서술도 나온다.)
2부(10~25장)는 3월 15일부터 6월 25일까지 대관식 직전의 시간을 다룬다. 대서양에서 폭풍우를 만나 이 도시에 우연히 좌초된 랭세호(마르세유발 부에노스아이레스행)에 어떠어떠한 자들이 있고, 그들이 이 아프리카 왕국에서 뭘 보고 듣고 무슨 일을 겪는가, 즉 1부에 대한 전사前事를 보여준다. 또한 1부 공연무대에 오른 기묘한 묘기들, 장치들, 기구들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고 누구에 의해 어떻게 준비되었는지, 그 과정이 이야기된다. 말하자면 1부의 수수께끼 같은 묘사에 대한 해답이 곧 2부다.(따라서 이 초판의 첫 페이지 상단에는 이런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고도 한다: “레몽 루셀의 예술에 입문하지 않은 독자들은 이 책을 읽을 때 먼저 168~354쪽(2부)부터 읽고, 이어서 1~168쪽(1부)까지 읽는 게 유리할 것이다.”)
3부(26장)는 6월 26일 대관식을 마무리짓는 서사시를 읊는 데서부터 7월 19일 포로 상태에서 해방된 유럽인들이 다시 마르세유로 귀환하며 헤어지는 장면이다.
낯설고 다양한 기예공연 같은 이 소설은, 기법으로 그려나간 언어 속에 깃든 세상의 낯섦과 환상적 실재에 다가가도록 독자를 진진한 이야기 세계로 이끈다. 이 책을 옮기고 작가를 연구한 불문학자 송진석은 “루셀의 기법이 새로운 것은, 천재적 영감 대신에, 임의로 선택한 단어에서 작품의 기원을 찾고 또 필요한 질료를 얻어낸다는 사실 때문이다. ‘보편적 영광’을 꿈꾸던 루셀이 신비의 베일을 찢으며 작가와 작품을 평범과 우연의 차원으로 끌어내리고 있다”며 루셀 문학의 독창적이고 공평한 무한상상의 지평으로 안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