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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며
선비로서 순절한 황현
지식인으로서 한말의 격동기를 살아가기가 너무 버거웠던, 황현. 그는 전라도 변방의 산부리에 살면서 시대적 고뇌를 홀로 짊어지고 살다가 순 절했다. 그는 체구가 작고 병이 잦았을 뿐만 아니라 용모 또한 비범하지 않았다. 더욱이 지배세력의 도덕적 책임감을 운위할 정도로 집권층을 대변하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의 말처럼 조선 왕조가 500년 동안 길러온 수많은 선비 중에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 왕조와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졌다.
황현이 태어나 활동했던 시기는 그야말로 격변기로서 조선의 성리학적 지배체제가 급속히 무너지는 소용돌이 속의 상황이었다. 19세기 말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며 국권을 수호하려 했지만, 1910년 8월 일본제국주의에 병탄을 당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황현은 구국애민을 지향한 지식인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순절했다. 해방 이후 그에 대한 연구는 그의 명성만큼이나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상당한 저작물을 남겼다. 특히 그는 2,000여 수의 시를 남김으로써 조선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그의 저술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오하기문(梧下記聞)』 등은 한국근대사의 가장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시인이나 역사가로서 황현의 특징을 밝히기보다는 경술국치를 당하자 순절한 우국지사로서의 구체적인 삶을 조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의 생애와 교우관계, 그리고 활동 및 저술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로써 그가 평생 지향했던 삶의 목표와 구체적인 행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