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는 철학이나 정치경제학을 역사적 지배 이데올로기로 보면서 『자본』을 ‘철학 비판’을 잇는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저술했다. 분과 학문으로서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자본』은 자본주의의 위기 및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연성을 논증하는 과학으로서의 지위를 얻는다. 그런데 제2인터내셔널 이후의 맑스레닌주의와 알튀세르주의 전통은 『자본』을 다시 ‘정치경제학’이나 ‘철학’의 하나로, 즉 하나의 분과학문으로 거꾸로 읽어 왔다. 맑스적 ‘비판’의 제거와 실종은 상품, 화폐, 가치, 잉여가치, 이윤, 이자, 지대, 축적 등 『자본』의 여러 범주들을 역사적 범주가 아니라 실증적 범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자본』은 현실 사회주의 체제나 그에 종속된 사회주의 운동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사용되었고 운동과 혁명이 자본주의 사회의 범주들을 재생산하는 것으로 귀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책은 『자본』 읽기의 이 오랜 전통들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자본』의 모든 범주들을 자본과 노동이라는 쌍방, 즉 두 계급의 정치적 갈등과 투쟁의 범주로, 이 갈등과 투쟁 속에서 생성되고 소멸하는 역사적 범주로 읽어가는 ‘정치적으로 읽기’의 방법을 제안한다.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상세한 소개
1970년대 후반에 사회운동이 약해졌을 때 맑스에 대한 연구는 마치 그 나름의 생명을 갖는 것처럼 보였다. 구조주의자, 포스트구조주의자, 해체론자 들이 미국과 유럽의 저널과 세미나실에서 꽃피었다. 이 맑스주의자들과 그 해석자들은 세계를 해석하기 위해 투쟁했고 때로는 맑스를 해석하기 위해 투쟁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문제는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혁하는 것이라는 맑스의 금언을 잊어버렸다. 1979년에 해리 클리버는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그 세미나실들 안으로 ‘『자본』을 정치적으로 읽기’라는 기폭장치를 설치했다. 『자본』 1장을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읽음으로써 그는, 『자본』이 학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자들을 위해 쓰여졌으며 우리가 이제 노동자라는 범주를, 주부, 학생, 실업자 그리고 여타의 비임금 노동자들까지 포함할 수 있도록 확장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1960년대 유럽의 새로운 사회적 투쟁, 1970년대 이탈리아의 아우또노미아 투쟁, 1990년대 멕시코 사빠띠스따들의 투쟁, 그리고 2000년대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투쟁, 2010년대의 전 지구적 반란들 사이의 이론적·역사적 다리를 제공한다. 1장에 배치되어 있으면서 독립성을 갖는 그의 서론은 『자본』이 출판된 이후에 전개된 노동자 계급 투쟁에 대한 훌륭하고 간결한 개요를 제공한다. 각각 2000년, 2012년에 추가된 그의 영어판 서문, 독일어판 서문은 이 책의 핵심적 내용과 역사적 의미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며 2018년에 추가된 한국어판 서문은 촛불혁명 이후의 한국 현실에서 이 책이 갖는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의미를 친절하게 역설한다.
한국에서의 맑스의 『자본』의 역사
칼 맑스의 『자본』(Das Kapital)은 150여 년 전인 1867년에 그 첫 권이 출간되었고 2권과 3권은 맑스 사후에 엥겔스의 편집을 거쳐 1885년과 1894년에 각각 출간되었다. 한국에서 『자본』이 우리말로 읽히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해방공간에서 1947년부터 1948년 사이에 최영철, 전석담, 허동 공동번역으로 『자본』(서울출판사)이 2권까지 출간되었지만 분단은 사실상 『자본』을 한국에서 (그리고 북한의 ‘주체’화 이후에는 한반도 전체에서) 추방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한국에서 『자본』은 오랫동안 ‘읽기’ 이전에 ‘출판’ 그 자체가 과제였던 금지된 도서로 남아 있었다. 완역 출판에 이르는 긴 해금의 과정은 탄압을 피하기 위한 비실명 출판뿐만 아니라 출판사(이론과실천, 백의) 대표들이 투옥을 무릅쓰고 감행한 저항과 투쟁을 포함하는 과정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것의 완간이 1990년 전후 베를린장벽의 붕괴, 소련의 해체, 그리고 맑스레닌주의 퇴조의 시기와 겹쳤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맑스는 『자본』을 노동자들에게 읽힐 목적으로 썼지만 한국에서 『자본』은 대학으로 복귀한 진보지식인들을 매개로 진보적 사상을 뒷받침하는 분과학문(경제학)의 텍스트로 자리 잡아 갔다.
맑스 200주년,『자본』을 “정치적으로” 읽는다는 것
해리 클리버의 책 Reading Capital Politically(2000)는 누구나 알 수 있다시피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등의 책 Reading Capital (『자본론을 읽는다』(두레, 1991), 불어본 1965; 영어본 1970)을 염두에 두고 그것에 ‘Politically’를 덧붙인 제목이다. 후자의 제목이 ‘읽기’ 그 자체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면 전자의 제목은 읽기의 방법, 즉 ‘어떻게’에 강조를 둔 점에서 전자와 차이가 난다. 그런데 방법의 관점에서 볼 때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등의 Reading Capital은 단순한 읽기가 아니라 『자본』 읽기의 새로운 방법을, 즉 ‘정치경제학적으로 읽기’ 대신 ‘철학적으로 읽기’를 제안한 것이라고 클리버는 해석한다.
해리 클리버는 이론적 실천의 상대적 자율성을 확립하려는 알튀세르의 이 시도가 결과적으로는 경제 결정론을 재추인함과 동시에 계급투쟁을 역사의 중심무대에서 삭제하는 효과를 낳았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이런 인식 위에서 쓰여진 Reading Capital Politically는 알튀세르가 Reading Capital에서 사용한 ‘철학적으로 읽기’의 방법이 봉착한 한계 지점에서 ‘『자본』 읽기’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정치적으로 읽기’는 ‘정치경제학적 읽기’와 ‘철학적으로 읽기’와는 다르게, 그것에 대항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자본』 읽기의 방법론으로 제안된다.
이 책은 맑스 탄생 200주년을 맑스에 대한 회의로 맞이하는 청산주의적 시류를 거부하면서 지금 필요한 것은 맑스 청산이 아니라 오히려 맑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있음을 환기시키고 있다.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40년, 발행과 번역의 역사
정확히 40년 전인 1978년에 영어로 처음 발행되었던 해리 클리버의 이 책은 역사적 과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요한 계기마다 끊임없이 다시 주목되었고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거나 재출간되었으며 2000년에는 영어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이 책의 초판은 스페인어(1981, 멕시코), 한국어(1986)로 번역 출판되었고 개정판은 스웨덴어(2007), 터키어(2008), 폴란드어(2011), 독일어(2012), 그리스어(2017) 등 7개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2012년에는 인도에서도 영어로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주목할 것은 초판이 멕시코와 한국과 같은 당대의 제3세계권을 중심으로 출판되었음에 반해 개정판은 중동, 동구, 서아시아, 북유럽, 남유럽 등 세계의 폭넓은 지역에서 출판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출판 초기보다 2000년대 이후에 이 책이 세계인들의 더 광범위한 관심을 끌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1986년 전두환 독재체제하에서 이 책의 초판이 한국어로 번역되었지만(한웅혁 옮김, 풀빛) 정통 맑스레닌주의 전통을 비판하고 자율주의적 맑스주의 흐름을 새롭게 발견하고 구축하려 한 이 책은 두 가지의 장애에 직면했다. 하나는 전두환 정권의 법적 금서 지정이며 또 하나는 당시의 주류 운동이었던 정통 맑스레닌주의 운동과 주체사상이 만들어 낸 정치적 기피다. 이후 1990년대 소련의 해체와 신좌파적 관심의 부상이 이 책을 수용할 수 있는 긍정적 환경을 만들어 냈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장애가 나타났는바, 책의 절판이 그것이다.
이 책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2000년 영어개정판을 새로이 완역한 후, 특히 최근의 정치적 상황과 이론적 지형 속에서 이 책이 갖는 지위와 의미에 대한 포괄적이고 요약적인 서술을 담은 장편 서문인 독일어판 서문,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등장 속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이 책(의 노동가치론)이 갖는 특별한 의미를 담은 한국어판 서문을 포함했다. 이로써 한국어는 초판과 개정판을 모두 번역 출판한 첫 번째 언어가 되었다.
자본주의는 무엇보다 우리 삶을 노동에 끝없이 종속시키는 것에 기반한 사회 시스템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은 칼 맑스의 『자본』 1권 1장에 대한 상세한 연구를 통해 맑스의 가치 분석을 재검토하고자 한다. 이 연구의 목적은 1장의 추상적 개념들을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투쟁에 관한 맑스의 전반적 분석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가치 분석의 정치적 유용성을 도출해 내는 것이다. 클리버는 지난 반세기 동안 『자본』은 이런 방식으로 거의 읽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독해 방식은 거의 무시되었다고 본다. 이 책이 읽힐 때에도, 여러 경향의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정치경제학, 경제사, 사회학, 심지어 철학 분야의 작품으로 간주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정치적 도구라기보다 학술적 연구의 대상이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 책의 본문은 맑스의 가치 분석을 정치적으로 읽음으로써 『자본』 전체를 정치적으로 읽는 것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 재해석은, 『자본』에서 맑스가 제시한 노동가치론이 자본에 대한 노동의 가치론(a theory of the value of labor to capital)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자본에 대한 노동의 가치란 무엇보다 사회를 조직하고 우리를 통제하는 근본적인 수단으로서의 노동가치임을 강조한다.
노동가치론에 대한 이해는 자본주의에서 모든 것은, 그것이 목표를 성취할 때이건 목표를 성취하지 못할 때이건 간에, 사람들의 삶이 자본주의적 노동에 어느 정도로 종속되고 또 반대로 사람들이 그 종속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데 어느 정도로 성공하는가를 둘러싼 적대적 투쟁의 양상이라는 점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정치경제학적 읽기와 철학적 읽기는 모두 생산대상, 생산수단, 생산물을 3대 요소로 하는 자본주의적 ‘노동’을 모델로 삼는다. 해리 클리버에게 ‘정치’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노동’ 모델에 대한 비판이다. 노동은 전적으로 생산수단 소유자들(즉 자본가들)에 의한 강제의 산물이다.
이 책의 구성과 각 장별 내용
서론은 세 가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미국에서 나타난 맑스주의에 대한 관심의 놀랄 만한 만개에 대한 간략한 분석이다. 그 만개는 전후 케인스주의 시대를 위기에 던져 넣은 투쟁주기 동안에, 즉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나타났다. 또 하나는 맑스주의 전통의 주류 노선에 대한 해설이다. 그 조류들에는 특히 (알튀세르의 작업을 포함하는) 정통 맑스레닌주의와,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부터 그것의 더욱 현대적인 표현들에 이르는 비판이론이 포함된다. 저자가 보기에 이 전통들은 자본주의 착취의 메커니즘에 초점을 맞추면서 노동계급의 자기활동성을 이론화함에 있어서는 무능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세 번째 부분은 그러한 일방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극복했다고 생각되는, 그리고 저자의 작업과 유사성을 갖고 있거나 그의 작업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는 맑스주의 전통의 자율주의적 흐름들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된다.
맑스를 읽는 이 여러 접근법들에 포함된 『자본』 읽기를 정치경제학적 읽기, 철학적 읽기, 정치적으로 읽기로 구분한 후 클리버는 정치적 읽기의 방법에 따라 『자본』 1장을 분석한다. 이 책 2장에서는 맑스가 상품 분석에서 시작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 정치적 이유를 논의한다. 왜냐하면 저자가 보기에 상품형태야말로 자본주의적 노동 부과의 기본 형태이고, 따라서 계급투쟁의 기본 형태이기 때문이다. 3장에서는 가치의 실체를 자본이 강제한 노동으로 본 맑스의 분석을 해석하고 가치의 척도, 즉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근저에 놓여 있는 노동시간을 둘러싼 투쟁에 대해 논의한다. 이어서 4장에서는 다양한 형태들(단순 형태, 확대 형태, 일반 형태 및 화폐형태)의 가치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 관계를 표현하는 방식들을 분석하고 그것들이 노동계급 투쟁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논의한다.
이 책의 세계경제적, 국제정치적 의미
독재 정권의 억압적 정책들에 대한 반란들인 아랍의 봄(2011년)은 금융 붕괴의 부담을 그것을 야기한 사람들(은행, 다른 금융 투기업자, 그리고 정부 정책 입안자들)로부터 금융 위기의 파고 속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직장, 주택, 저축, 보험 및 미래에 대한 희망을 모두 잃은 노동 대중들)에게 전가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반란으로, 즉 유럽과 미국의 가을로 이어졌다.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에서의 아랍 봉기가 아랍 세계 내의 다른 곳에서의 반란을 촉발시켰고 <유럽연합>의 긴축 정책에 반대하는 그리스의 반란이 아테네에서 스페인까지 그리고 그 너머까지 유통된 것처럼, 로어맨해튼에서의 월스트리트 점령도 수 주 내에 미국 전역과 전 세계에 걸쳐 수많은 유사한 점거를 촉발했다.
비록 이 책은 1970년대에 쓰여졌지만, 저자는 이 책을 신자유주의가 등장한 첫 10년 동안에 썼다고 밝힌다. 저자가 작업한 맑스주의 이론의 재해석은 부분적으로 그 당시에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 새로움이란 ‘발전된 나라들’에서 채택된 자본주의 전략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자본주의 형태(케인스주의)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매우 억압적인 종류의 경제 정책으로 이행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금융 위기를 영구적으로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화폐와 금융이 필수적인 구성계기인, 사회의 부르주아적 조직화를 폐지하는 것이다. 사회의 부르주아적 조직화를 폐지한다는 것은 삶의 노동에로의 끝없는 종속을 폐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리 클리버는 ‘2012년 독일어판’ 서문에서 이러한 방향의 핵심이 상품화, 화폐, 금융이 지배 하는 공간인 시장으로부터 독립적인 공통장(commons)의 발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내놓는다. 클리버는 기존 사회에서 발견되는 공통장의 사례로 공유지를 보존하고 확보하여 자치적 문화 활동의 기반으로 삼는 투쟁, 공동체 농장이나 사회센터와 같은 자치공간 확보 투쟁, 도시농업이나 수경재배처럼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자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노력, 인터넷에서의 정보·지식·음악·예술·경험의 자유로운 공유, 공통장을 전유하여 축적의 도구로 삼고 공통장의 성장을 저지하려는 자본의 지적재산권 기획을 무력화하려는 투쟁, 타흐리르 광장이나 주코티 공원에서 벌어진 점거투쟁처럼 인클로저를 역전시키는 작은 공통장들의 창출, 그리고 사빠띠스따들이 보여 주었던 자기가치화 투쟁 등을 예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