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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 평전

구마라집 평전

  • 공빈
  • |
  • 부키
  • |
  • 2018-11-30 출간
  • |
  • 704페이지
  • |
  • 준비중
  • |
  • ISBN 9788960516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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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구마라집의 일대기,
불경 전래사이자 실크로드를 둘러싼 문화사

이 책은 4세기 중반(344년)에서 5세기 초반(413년)을 살았던 구마라집의 일대기다. 당시는 중국사에서 보면 정치 사회적으로 어지러운 시대라 새로운 철학과 사상이 절실한 때였고, 불교사의 시각에서 보면 중국의 초기 불교 이해가 한계에 다다른 때이기도 했다.
그런 시대, 그런 상황에서 구마라집은 역경가이자 사상가로, 또 큰 수행자로 활동했다.
그는 먼저 한역 불경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 위대한 역경가로 기록된다. 구마라집은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는 대승 경전인 《금강반야바라밀경》 《묘법연화경》 《유마힐경》 등을 한역했다. 우리가 오늘 읽는 바로 그 문장, 그 뜻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동시에 구마라집은 동아시아에 《중론》 《백론》 《십이문론》 등 중관학의 공관(空觀)을 전파한 사상가였다. 또 중국에 선종이 태동하기 전 선경(禪經)을 번역하여 초기 선법을 전한 시대를 앞선 수행자였다.
그의 삶은 불교 전래의 역사와 함께한다. 공간적으로 그의 삶은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에서 동아시아로 이어졌다. 일곱 살에 사미승이 되어 십 대에 타림 분지와 파미르고원을 둘러싼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불교문화를 체험하며 불학을 배우고 명성을 떨쳤다. 사십 대에는 구자국을 떠나 중국 동쪽 변경 고장에서 17년간의 긴 유폐 생활을 보낸 다음 후진의 수도 장안에서 역경(譯經)과 강설(講說)로 홍법의 뜻을 이루었다. 그 과정을 시간적으로 보면 구마라집의 행적은 불학이 소승에서 대승으로 전환하고, 대승 공 사상이 동방으로 퍼져나가는 길잡이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구마라집 평전》은 한 인물의 삶의 기록이자 불경 전래의 역사이며 실크로드의 시대 풍경을 담은 사회 문화사로서 역할을 한다. 이를 위해서 책은 《진서》 《한서》 등의 역사서, 《고승전》 《출삼장기집》등 많은 승려들의 전기와 여러 기록물을 기초로 하여 중앙아시아의 찬란했던 불교문화, 파미르고원과 타클라마칸 사막의 험난한 자연환경, 전란이 끊이지 않았던 오호십육국의 상황, 장안 역장(譯場)의 생생한 모습, 강남 여산의 혜원과 보기 드문 불학 교류, 구마라집과 함께한 걸출한 제자들의 면면까지 4, 5세기 서역과 중원의 문화, 사회, 승단의 모습을 되살려 내고 있다.

“연꽃이 더러운 진흙 속에서 피는 것과 같다.
오직 연꽃만 취하고 더러운 진흙은 취하지 말라”

“성품이 소탈하고 활달하여 자질구레한 일에 구애받지 않았다.”
《고승전》에 나오는 어린 시절 구마라집에 대한 성격 묘사다. 그다음에 이어진다. “그의 모든 행동이 수행자들에게 이상하게 보였다. 그러나 구마라집은 스스로 이해하는 바가 있어 남의 의심에 마음 쓰지 않았다.”
구마라집은 복잡한 특성과 매력을 지닌 인물이다. 믿기 힘들 정도로 다사다난한 인생을 살았고, 수행자로서 겪기 어려운 치욕과 모욕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현실에 꺾여 뜻을 접지 않았고 세상을 원망하며 숨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 비구의 계율을 어겼다고 주변의 수군거림을 받을 때도(4장), 세속의 권력자에 의해 파계할 때도(9장), 무도한 전진의 장수 여광에게 조롱당할 때도(11장), 음계를 어긴 스승에게 반감을 가지며 제자로부터 대우 받지 못할 때도(17장)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를 “천재는 제멋대로 행동하기 십상이고 소소한 규율을 닦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성격과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는 정신이야말로 학술 연구와 예술 창조의 전제조건인 것이다. (…) 구마라집이 말한 대로 한평생 홀로 엄격하게 계율을 지킨 자들 중에서 몇 명이나 불법을 크게 흥하게 했는가? 불교가 계율을 만든 근본 목적은 자신을 이롭게 하는 데 있지 않고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갈고 닦아 아라한과를 얻어 중생을 제도하는 데 있다”(138쪽)고 저자는 말한다.

“파계하지 않으면 우바굴다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계를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
한때 구마라집은 지혜 제일인 사리불(부처의 십대제자)의 현신, 용수보살(제2의 붓다로 일컬어짐)의 재림, 우바굴다(인도의 제4대 조사로 아소카왕의 왕사)에 못지않으리라는 평을 얻었던 천재적 사상가이자 수행자였다. 하지만 그를 얻기 위해 두 번의 전쟁이 일어나고 그들에 의해 두 번의 파계를 했다. 포로가 되어 장안으로 가던 중 전진의 왕 부견의 죽음으로 황량한 땅 고장에서 십칠 년을 머물며 여광의 군사(軍師)나 하며 중국어를 익히고 중국 전적과 불경을 읽었다. 육십 대가 거의 다 되어서야 장안에 와서 후진의 군주 요흥의 지원 속에 불경을 번역하고 강설하며 홍법의 뜻을 이루었다. 그 과정은 그 자체로 개인의 역사를 넘어 시대의 현실이었다. 하지만 구마라집이 겪은 계율을 어긴 수행자의 번뇌와 업장이 깊고 무거움에 대한 고통은 컸고, 그 고통을 대승 공관으로 속박에서 벗어나며 세상의 따가운 시선에 대처하는 의연하고 담담한 모습이 기록과 상상을 넘나들며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구마라집과 사막을 지나고
파미르고원을 넘고 인더스강을 건너…

인도 중부에서 발생한 불교는 서북쪽 계빈, 간다라, 대월지 등을 거치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타림분지 주변 서역을 지나 중국에 전해졌다. 구마라집의 삶도 구자국을 기점으로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 중앙아시아에서 동쪽 중국 고장, 장안으로 이어졌다.
구마라집의 일생을 따라가는 여정에는 불법뿐 아니라 험준한 자연환경, 찬란했던 불교 사회의 모습, 서역만의 독특한 문화가 함께한다.
실크로드 천산남로의 구자는 서역의 핵심 국가이자 물산이 풍부하고 불교가 흥성한 나라였다. 수도 연성에서 북쪽으로 사십여 리를 가면 “고차하의 서쪽 연안은 기복을 이룬 언덕이었고, 작리대사는 그 언덕 위에 서 있었다. 각 층의 건축과 금박이 칠해진 불당과 불탑 등은 언덕 위에 난데없을 정도로 화려하게 세워져 있었고, 그 기세는 장엄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저 갈색의 언덕은 마치 황금색을 주조로 하는 거대한 주단(綢緞)으로 변해서 남쪽에서 시작해서 북쪽까지 대지를 덮는 듯했다”(37쪽)는 작리대사가 눈앞에 나타난다.
아홉 살 구마라집의 계빈 유학길을 가다 보면 수많은 구법승과 상인들이 다녔을 파미르고원과 인더스강을 만난다. “우전하의 양안은 사람 사는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사방은 온통 모래와 자갈뿐이었다. 가는 내내 마차 바퀴가 모래와 자갈에 끼이고 걸렸다. 냉기를 품은 매서운 칼바람은 뿌연 먼지를 몰고 왔다. 며칠 동안 큰 바람이 불었다. 모래와 자갈이 섞여 바람에 날렸고 말은 비명을 지르며 울어댔다.”(92쪽)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돌산에 있는 힘을 다해 겨우겨우 기어올랐다. 꼬박 반나절을 보내고 나서 마침내 비좁은 협곡 입구에 이르렀다. 입구 맞은편과 좌우 양쪽의 산봉우리 모습은 커다란 짐승의 새하얀 어금니 같았다. (…) 말이 풀을 뜯지 않고 머리를 들어 귀를 세운 채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았다. 바위에서 내려온 말몰이꾼 두 명이 바람을 맞아가며 밧줄을 단단하게 부여잡고 간신히 말들을 끌었다. 그들은 한데 모여 서로를 꽉 잡았다. 눈 깜짝할 사이 눈발이 거세게 몰아쳤다.” “벼랑에서 내려다 본 협곡의 물살 빠르기는 화살이 날아가는 듯했다. (…)그 강은 거의 상상에나 나올 법한 고난과 위험을 의미했고, (…) 정으로 쪼아 벼랑에 만든 통로에서 위아래로 칠팔백 개의 계단이 있었다. 한 시간쯤 후 일행은 마침내 높은 벼랑에서 신두하 강가로 내려왔다. 강 위로 가로놓인 긴 밧줄은 사발보다 굵었다. 굵은 밧줄에 매달려 있는 커다란 광주리는 십여 명 정도를 실을 수 있었다. 거센 바람이 계곡을 휩쓸었고 밧줄이 이리저리 계속 출렁였다.”(98-100쪽)
사막을 가로지르고 파미르고원을 오르고 인더스강을 건너는 자연과의 사투를 하고 나면 만나는 곳이 최고의 학맥을 자랑하던 불국 계빈이다. “노란색 작은 꽃잎을 활짝 피운 개자리가 깔린 들판은 아름다운 양탄자 같았다. 자주 눈에 띄는 코끼리 무리가 물소와 목 쪽이 불뚝 솟은 이른바 봉우(封牛) 무리 사이에서 갑자기 뛰어나오기도 했다. 곳곳에 보이는 사육한 공작들이 저마다 아름다운 깃털을 뽐냈다. 민가와 궁실의 건축은 정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문설주 위에는 대부분 조각상이 있었다. 금은동과 주석으로 만든 물품에는 정교한 꽃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저잣거리에서 유통되는 금은 화폐의 앞면은 국왕의 두상이었고 뒷면은 기마 형체이거나….”(101-102쪽)
험한 자연과 화려한 시가지만 만나는 것은 아니다. 서역 남로 우전국에서는 불상 뒤를 따르며 절하고 춤추는 종교 의식인 행상(行像)을 볼 수 있고, 구자에서는 서역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악무인 <소막차(蘇莫遮)>, <호등무(胡騰舞)>와 <호선무(胡旋舞)>, 우리에게도 익숙한 <오방사자무> 공연도 함께할 수 있다. 여기에 당나라 시인 유언사가 지은 칠언고시 <중승 왕무준의 집에서 밤에 호등무를 감상하다(王中丞宅夜觀舞胡騰)>(268쪽)를 읽으면 전진의 여광이 384년경 구자에서 보고 아름다움에 넋이 나간 구자 악무가 삼백여 년 뒤에는 당나라에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여광 군대의 전리품에 실려 간 것일지도 모른다. “구자국과 서역에서 획득한 수많은 보물과 진기한 물건과 희귀한 동물들이 이만여 필의 낙타와 만여 필의 말에 실려 실크로드를 가득 메웠다. (…) 낙타 무리는 느릿느릿 움직이는 긴 선처럼 보였는데, 그 끝은 보이지 않을 만큼 길었다. (…) 부발 두 마리를 가둔 커다란 상자가 소가 끄는 두 바퀴 달린 수레에 실렸다. 그중 한 마리는 뿔이 하나였고 다른 한 마리는 뿔이 둘이었다. 이 두 마리는 평상시에는 상대방을 향해서 서럽게 울었다. (…) 전리품 중에는 강거 출신의 마술사도 몇 명 있었고, 호등무와 호선무를 담당한 십여 명의 남녀 배우와 오방사자무의 사자랑 배우도 있었다. 나무 상자 안에는 구자의 각종 악기가 실려 있었다.”(327-328쪽)


“스승이 미처 도달하지 못한 것을 제자가 그 뜻을 열어 주는구나.
화상은 나의 대승의 스승이고, 나는 화상의 소승의 스승이오”

불교는 논증이 치밀하다. 더욱이 구마라집이 동쪽에 처음 전한 대승 공 사상은 당시 중국 승려는 물론이고 소승 설일체유부의 승려가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연기법(緣起法)에 근거한 소승의 논리와 대승의 일체법개공(一切法皆空)의 논리는 완전히 다른 사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불교의 교리와 계율 등을 때론 역사를 약술하는 방식으로, 때론 논쟁하는 대화 방식으로, 때론 대소승 경전에서 관련 내용을 옮겨와 보여 준다. 그 중 구마라집이 소승에서 대승으로 개종할 때 대승 경전인 《아뇩달경》을 처음 배우며 눈앞에 드러나 있는 것이 실상(實相)인지 대승 포교자와 논쟁하는 장면은 치밀한 논증 과정을 보여 준다.(148-155쪽)
또 하나는 소승의 사부 반두달다를 대승으로 교화시키는 장면이다. 구마라집은 아홉 살에서 열두 살 무렵 당시 소승 불교의 메카였던 계빈에 유학해 서역에 이름이 높았던 소승 삼장의 거두 반두달다를 스승으로 모시고 아함류 경전을 배운다. 이후 그는 대승으로 개종하고 고국으로 돌아가 금사자좌에 앉아 설법하라는 국왕의 권유를 물리치고 스승인 반두달다를 개종시키기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다. 소승을 대표하는 스승과 대승 공 사상을 서역에 널리 퍼뜨리는 제자의 논쟁은 소승과 대승의 차이를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다.
“구마라집은 비유를 들고 대승 경전을 널리 인용하면서 ‘일체법개공’의 깊은 뜻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그 모습은 성 안에서 벌이는 전투와 같았다고 한다. 서로 죽기를 각오하고 치고받는 듯했는데 일 개월여에 걸친 논쟁 끝에 열세에 놓인 달다는 점점 ‘성공(性空)’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203쪽)

구마라집이 “일체 모든 법은 결국 공”이라는 구절을 해석할 때 반두달다가 의문을 표시하며 구마라집에게 반문했다. “유위법은 생주이멸을 말하는데, 대승에 어떤 다른 것이 있어서 그대는 대승에 귀의하여 대승을 높이 받드는가?”
이에 구마라집이 답했다. “유위법의 사상(四相)은 가법(假法)에 지나지 않으며 실법(實法)이 아닙니다. 생주이멸은 때때로 변하고 자성이 없으니, 즉 《덕녀문경》이 말하는 인연·공·가(假) 등이 바로 이것입니다. 대승의 이치는 매우 깊어서 유법(有法)이 모두 공(空)임을 분명히 드러내는데, 소승은 유(有)에 집착하고 누실(漏失)이 많으니 그 때문에 대승은 숭상하고 높일 만합니다.”
하지만 반두달다는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그대가 말한 ‘일체 모든 법은 결국 다 공[一切諸法畢竟皆空]’이라는 것은 심히 두려워할 만하구나. 어찌 유법(有法)을 버리고 공(空)을 좋아할 수 있단 말이냐. 그 옛날 미치광이와 같구나.
“스승님의 비유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체제법필경공’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법의 무자성(無自性)을 지적한 것입니다. 법상(法相)의 상은 인연이 화합해서 생겨나는 것으로서 실체(實體)가 없습니다. 대승은 유로써 공을 증명하지만, 유는 비유(非有)이고 공상(空相)이고 가명(假名)입니다. 유는 속제(俗諦)이며, 대승은 속제로써 제일의제를 증명합니다. 제일의제가 바로 공입니다. …… (201-203쪽)

중국 장안에서 대승 공사상을 전파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구마라집은 “중국 땅에는 깊은 학식이 있는 자가 적어” 가장 중요한 중관학의 논서 번역도 뒤로 미루었다. 중국 승려들이 공사상에서 어떤 문제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사례가 강남 여산의 호법보살로 유명한 혜원과의 서신 왕래였다. 구마라집이 장안에 들어왔다는 것이 전해지자 혜원이 편지를 보내 시작된 강남북의 서신 교류는 당시 중국의 불학 수용 상황과 구마라집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는 사료다.(18장) 오랫동안 이어진 구마라집과의 교신에서 드러나듯이 혜원은 물(物)이 그 자체로 공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어했다. 중국 불교의 수준이 그러했다.

“아름다운 문채를 잃어버리면 …
번역은 밥을 씹어 남에게 주는 것과 같으니
맛을 잃어버릴 뿐 아니라 구역질나게 만든다”

불법은 경전으로 전해진다. 범어로 된 불경 논서 율장이 한역되는 시기와 종류를 보면 불교의 전파 과정을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구마라집은 장안 소요원과 초당사에서 십여 년 동안 삼백여 권의 불전을 한역했다. 그중 중국 불교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중론》 《백론》 《십이문론》 등 중관학 논서의 한역이다. 이 논서로 대승 공 사상이 중국에 처음 소개되었다. 또 《금강경》 《법화경》 《유마경》 《대품반야경》 《소품반야경》 등의 주요 대승 경전은 오늘날까지도 구마라집 역본이 다른 어느 역본보다도 널리 읽히고 사랑받는다.
“문자는 죽이고 뜻은 살린다”고 하듯이, 문자에 구속되지 않고 뜻을 깊이 새긴 번역이 구마라집의 손에 의해 이뤄졌다. 중국 불교의 저변이 아름답게 닦였다. 그 번역의 현장이 이 평전에서 재현되었다.
구마라집의 역장은 번역과 강경이 이루어지는 홍법의 장이자 학술 활동의 공간이었다. “구마라집은 호본을 들고 중국어로 읽어 내려갔다. 경전의 원문을 번역하는 한편으로 뜻풀이도 했다. 사실 역장의 의학 사문이 모두 번역에 참여했다고 할 수 있다. 국왕 요흥은 직접 《대품반야경》의 옛 번역본과 새 번역본을 대조하면서 어느 곳이 나아졌고 어느 곳이 부족한지를 살폈다. 혜공, 승략, 승천, 보도, 혜정, 법흠, 도류, 승예, 도회, 도표, 도항, 도종 등 오백여 명이 반복해서 불전의 바른 의미를 토론하고, 번역문의 뜻을 심의한 후에야 정본(定本)을 써서 완성했다. 이처럼 폭넓은 참여와 엄숙하고 진지하고 조금의 빈틈도 없이 진행되는 토론 속에서 번역 작업은 진정한 학술 활동으로 자리를 잡아갔다.”(456쪽) “승려와 속인이 모두 경건하게 한 구절마다 세 번씩 반복하면서 그 뜻을 새기고 정밀하게 추구하면서 성인의 뜻을 보존하는 데 힘썼다.”(602쪽)

[책속으로 이어서]
여찬과 여광이 장안에 이르도록 구마라집을 놓아주질 않은 까닭은, 후진의 사신이 말한 대로 구마라집의 깨달음이 비범하고 그가 말한 바가 모두 영험했기 때문이다. 술수와 관련해서 그 무렵 필적할 상대가 없는 법사를 어찌 적의 손에 들어가게 보고만 있겠는가? 석륵, 석호, 여광, 여찬, 그리고 얼마 후 저거몽손 등은 모두 불교를 술법으로 여겼고 고승을 술사로 생각했다. 천축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고승 담무참은 저거몽손을 방술로 교화했다. 탁발도(拓跋燾)도 담무참을 얻고자 했으나 저거몽손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고 끝내 무참히 살해했다. 여광과 여찬은 구마라집을 내주지 않았다. 그들이 구마라집의 몸에 해를 가하지 않은 것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_378쪽

범어의 불게(佛偈)와 경문이 불야다라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자리에 앉아 있던 수백 명의 의학 사문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분량이 매우 많은 대경전이 1권, 2권, 3권…… 매일 불야다라의 입에서 낭랑하게 흘러나왔다. 계곡물과 산속 샘물이 영원히 그치지 않고 흐르는 듯했다. 불야다라의 놀라운 암기 능력에 사람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불경의 내용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원시불교의 이 같은 전달 방식이 불야다라 같은 인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구마라집의 번역도 보통 사람은 생각해 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범음(梵音)이 불야다라의 입에서 흘러나오면 구마라집이 곧바로 중국어로 바꾸었다. 참으로 보기 힘든 하늘이 맺어 준 인연이었다. 형체 없는 기억이 곧바로 형상을 띤 문자로 바뀌었으니 그 오묘함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_460쪽

천 명이 넘는 제자들에게 떨쳤던 구마라집의 위엄과 명망은 곤두박질쳤고, 그의 뛰어난 제자들도 사부의 행동거지에 크게 반감을 가졌다. 승략이 특히 그러했다. ‘나 승략은 율행을 맑게 삼가며, 요흥으로부터 승주를 맡으라는 명을 받은 후 불법을 바로잡고 떨쳐 일으키는 것을 소임으로 여겼다. 적절하게 관리하여 승려와 비구니가 계를 지키는 분위기도 매우 좋아졌는데, 지금 수많은 승려의 지도자 되는 분이 도리어 기녀 열 명을 거느리고 있으니, 이것이 계율을 삼가며 지키는 장안 승단에 대한 도전과 조롱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내가 왜 승주가 되었는가? 승려와 비구니에게 계를 바르게 지키라고 힘써 가르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_520쪽

사 세기 초부터 오 세기 초에 이르는 대략 백여 년의 시기는 중국 불교사에서 가장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킨 시기였다. … 정권의 흥망성쇠, 교통 환경의 변화, 승단 영수의 사망 또는 이동에 따라서 어떤 때에는 불씨가 합쳐져 뜻밖에 화염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어떤 때에는 들판을 태우는 큰 불이 되어 휘황찬란하게 오래도록 꺼지지 않았다. 중국 바깥에서 온 고승의 지극히 힘들고 어려운 홍법 활동, 불교와 유교 사상 간의 충돌과 상호 영향, 불교 내부의 서로 다른 종파 간의 격렬한 논쟁 등은 역사에서 보기 드문 장관을 만들어 냈다. 그 시기는 남북이 분열되고 전란이 잦은 시대였지만 불교문화는 웅대하고 기이한 하늘을 나는 새처럼 강력한 날갯짓으로 사방을 뒤흔들었고, 황하와 장강과 고산과 협곡을 넘어 이질 문화를 구축하는 요새를 무너뜨리면서 중국 대륙의 하늘에 높이 날았다. _533쪽

어느 때에는 요진의 국주 요흥이 직접 역장에 와서 옛 경전을 들고 장단점을 점검하기도 했다. 도안 이전 시대의 불경 번역은 많은 경우 개인의 작업이어서 기껏해야 불교를 믿는 관리의 도움을 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또 역장의 규모가 작아서 영향이 크다고 할 수도 없었다. 도안이 장안에 머물던 시기 역장이 국가에서 받은 재정적 지원은 이전의 작은 규모일 때와 비교해 질적인 변화를 보였다. 하지만 구마라집이 주재하는 역장은 도안 시대에 비해서도 규모가 더 컸다. 또 국왕과 대신도 참석하고 천여 명의 뛰어난 인재들이 한데 모여 다른 판본의 문장을 참고하여 교정했고, 고역과 구역을 비교하고 의미를 연구하고 토론하는 곳으로 변해 역장은 번역과 강경의 학술 토론의 장이 되었다. _597쪽

구마라집의 번역을 ‘구역(舊譯)’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미, 언어, 음악, 문학 색채 등이 이전 번역과 다르고 새롭다는 뜻이다. 원본인 범본과 호본 불경의 원뜻은 물론이고, 서역 불전의 음악성과 문학적 색채도 전달할 수 있었다.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바로 ‘신뢰’, 즉 원뜻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경 번역을 하는 데 원뜻을 충실히 옮기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불교의 동전(東傳) 과정 초기에 번역가들이 동토에 막 도착했을 때 많은 경우 중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고, 번역을 돕는 자들도 범음과 호어에 밝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서로 상대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고, 그에 따라 이질 문화의 독자적인 특징을 체득하지 못해서 결국 불경의 본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었고 중국어로 제대로 전달하지도 못했다. _599-600쪽

구마라집이 번역한 불경을 소리 내어 읽을 때에는 음악의 리듬감과 문학적 색채도 느낄 수 있다. 리듬감은 구마라집이 불경에 범문의 음악적 특질을 의도적으로 넣으려고 한 것과 관련 있다. 일찍이 구마라집은 제자들과 천축국이 문장의 체제를 매우 중시하고 현악기와 어울리고 노래로 찬탄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며 경전 속 게송들은 모두 노래로 찬탄하는 시가라는 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구마라집은 중국의 《시경》과 한위 시대의 오언시와 칠언시를 배웠기 때문에 의문을 품을 만한 것이 없었다. _605쪽

중국의 불경 번역사에서 구마라집의 등장은 시대 구분의 의미도 지니면서 불경 번역의 분위기가 온전히 성숙되었음을 가리킨다. 구마라집과 문도들은 번역사에서 전혀 새로운 경지를 만들어 냈는데, 이는 훗날 사람이 계승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구마라집의 번역 작품은 통속, 간결, 유창했고, 노래처럼 부를 수 있는 리듬감과 문채의 아름다움을 담아내 번역 문학의 정점에 이르렀다. _607쪽


목차


저자의 말
1 구자의 사리불, 구마라집이 태어나다
2 일곱 살의 사미승
3 총령을 넘어 계빈에 유학하다
4 부처님의 가사를 입고 설법하다
5 구마라집, 대승으로 개종하다
6 서역에 대승을 전파하며 명성을 떨치다
7 구자를 손에 넣으면 구마라집을 장안으로 보내라
8 여광, 구자를 파괴하다
9 무도한 권력, 파계한 고승
10 구자에서의 마지막 나날
11 인욕과 침묵을 닦고 원한의 마음을 품지 마라
12 어둠에 갇힌 운명
13 서역의 고승 구마라집, 동방의 사미 승조
14 구마라집, 중원의 장안에 들어서다
15 한손에 범본 불경을 들고 중국어로 옮기다
16 구마라집의 걸출한 제자들
17 더러운 진흙 속에서 피는 연꽃
18 불세출의 천재와 호법 보살의 대화
19 초기 선법의 대가 구마라집과 불타발타라
20 불경 번역의 역사를 다시 쓴 홍법 대사
21 몸은 재가 되어도 혀만은 남아
22 제자들은 흩어지고 벗들은 떠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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