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잊혀진 ‘해양 DNA’
삼도수군통제영과 통제사, 그리고 통영 이야기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남해 포구에 위치한 통영은 지방 도시 이상의 무게를 지녔다. 통영이란 이름의 유래가 된 삼도수군통제영 덕분이다. 수군통제영과 그곳을 다스렸던 통제사들은 조선인의 삶과 조선왕조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서울의 연구자들은 별로 주목하지 않았지만 조선 후기, 통영에 위치했던 삼도수군통제영이 수행한 시대적 역할과 파급력은 크고도 깊었다. 그랬기에 지금은 한적한 관광도시, 수산도시에 불과한 통영이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풍성한 사연들이 넘쳐나도록 담겨 있다. <바다 지킨 용의 도시 삼도수군통제영>은 지금껏 소홀히 다뤄졌던 통제영의 역사적 중량을 복원하고 주변부에 머물렀던 통영과 해양의 중요성을 재조명한다.
남해바닷가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생긴 계기는 조일전쟁(임진왜란)이었다. 대전란을 경험한 이후 조선왕조는 생존본능에서 삼도수군통제영이란 계획도시를 건설하였고, 일본의 재침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강력한 군영체제를 오랫동안 유지하였다. 물산이 풍부한 해변에 많은 군력이 집중되면서 통제영은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큰 비중을 갖게 되었고, 역으로 한양의 중앙정치에까지 실질적 파워를 투사할 수 있었다. 300년 통제영 역사에는 208대에 이르는 삼도수군통제사들의 풍성한 에피소드가 담겨 있기도 하다. 이 책은 ‘바다를 버린 나라’ 조선에서 해양문화의 창(窓)이자 요람으로 기능했던 삼도수군통제영의 역사와 문화를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굴절됐던 한반도 해양문화의 회복을 시도하며 갯내음 물씬 풍기는 통영의 역사에 독자들을 초대한다.
통제영, 잠든 조선의 해양 문화를 깨우다
중세 이후의 세계사는 바다를 활용하는 능력이 각국의 운명을 갈랐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처음에는 동양이 앞서 나갔다. 중국은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시절이던 1406년부터 7차례에 걸쳐 정화가 이끄는 3만 명의 함대로 동남아와 인도, 아라비아, 아프리카까지 연결하는 대항해의 역사를 썼다. 유럽의 포르투갈이나 스페인보다 먼저 ‘지리상의 발견’에 나선 셈이다. 이때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영락제 사후 중국은 기왕의 해금정책(海禁政策)을 더욱 강화하며 바다를 멀리했다. 그 결과 세계 최선진국, 최강국이던 중국의 국력은 점차 서구에 뒤처지게 된다. 조선조의 해양사도 중국의 복사판이나 다름없다. 왕조 개창 이후 바닷길을 꽁꽁 걸어 잠갔고 그 결과 고려시대까지 꽃피웠던 한반도의 해양문화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서양의 근현대사는 바다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탈리아 북부에 자리잡았던 해상의 도시국가 베니치아가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5세기 이후, 베네치아 주민들은 훈족이 침략할 수 없는 갯벌에 말뚝을 박아 건물을 올리는 방식으로 도시를 건설하고서는 아드리아해는 물론이고 전(全) 지중해 세계를 석권했다. 베네치아인들이 이룩한 해상경영의 노하우는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며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전수됐고, 15세기 들어 유럽 각국은 앞다퉈 신대륙을 발견하고 식민지를 확대해 나갔다. 이후의 근세사는 해양화를 먼저 이룬 서양(유럽과 미국)이 육지에 갇혀 지낸 동양과 여타 지역을 리드해온 역사였다. 반면 일본은 바다를 대하는 자세가 한국이나 중국과 달랐다. 조선왕조가 섬나라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첫째 원인도 바닷길을 막고 국부민강(國富民强)의 길을 스스로 차단한 데서 찾아야 한다. 다만 남해바닷가에 통제영이란 작은 창(窓)이 열려 있었기에 조선의 해양문화는 완전질식을 피할 수 있었다.
수국(水國)과 삼도수군통제영의 역사
‘물 위에 뜬 나라’가 있었다. 한반도에 역사가 생겨난 이후 가장 엄혹했던 시절, 버려진 해변과 섬, 바다 위로 쫓겨난 백성들로서 이룩한, 작지만 굳센 공동체였다. 조선국 안의 또 다른 나라, 가칭하여 ‘수국(水國)’이었다. 조일전쟁(임진왜란)이라는 일대 혼란기에 불꽃처럼 생겨났다가 종전과 함께 왕조체제 안으로 녹아들어간 ‘군·산·정(軍·産·政)복합체’가 곧 수국이다.
수국을 세운 사람은 이순신이다. 이순신은 ‘바다를 버린 왕국’ 조선에 해양의 가치를 일깨워 주었다. 그가 세우고 아꼈던 ‘물나라, 수국’은 종전 이후 삼도수군통제영으로 계승되며 우리 해양문화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훗날 식민지로 조락했던 그의 조국이 해양강국으로 재기하는데 있어 정신적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다.(저자는 이순신과 수국에 관련된 내용을 저자의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 책에 자세히 소개했다.)
삼도수군통제영 3백년 역사의 기록
<바다 지킨 용의 도시 삼도수군통제영>은 저자가 2009년에 발간한 <이순신 수국(水國) 프로젝트>의 후속편인 셈이다.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는 1592년 조일전쟁이 발발하고 이듬해 충무공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후 ‘한산도(정유재란 시기에는 고금도) 통제영’을 중심으로 서남해 일대의 많은 섬과 해변에 나라에 비견할 만한 수국(水國)체제를 구축해 일본군과 대결했다는 ‘분석적 사실(史實)’을 기록한 책이다. 위 책은 조일전쟁 시기 이순신의 활약상을 주로 다뤘던 만큼 이순신 사후(死後) 삼도수군통제영 체제의 형성과 발전의 역사는 부차적일 수밖에 없었다.
통제영 3백년사에 대한 기록이 미흡했다는 아쉬움에서 저자가 9년의 세월이 지나 다시 꾸민 책이 <바다 지킨 용(龍)의 도시 삼도수군통제영>이다. 이 책은 전문연구서가 아니고 통영의 근세사를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볼 수 있게 꾸민 대중도서이다. 저자는 수백 년 전 조선왕조가 남해바닷가 외진 포구에 강력한 군진을 설치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그렇게 생겨난 군영체제가 역으로 조선인의 삶과 조선왕조의 역사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