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에 뜬 나라’가 있었다. 한반도에 역사가 생겨난 이후 가장 엄혹했던 시절, 버려진 해변과 섬, 바다 위로 쫓겨난 백성들로서 이룩한, 작지만 굳센 공동체였다. 조선국 안의 또 다른 나라, 가칭하여 ‘수국(水國)’이었다. 7년전쟁이라는 일대 혼란기에 불꽃처럼 생겨났다가 종전과 함께 왕조체제 안으로 녹아들어간 ‘군․산․정(軍․産․政)복합체’가 곧 수국이다. 수국을 세운 사람은 이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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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전쟁은 과연 기습이었는가?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것이 희극이자 비극이다. 분명 ‘통보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일본을 통일한 직후인 1587년 대마도주를 통해 조선 침공의 뜻을 피력하였다. 7년전쟁 발발 1년 전에는 더욱 분명하게 침략 의도를 알렸다. 1591년 3월,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 등이 귀국하면서 가져온 도요토미의 ‘서계(書契, 외교문서)’에는 명나라를 침공할 것이라는 결심을 통보하는 한편 조선은 중국과 일본, 어느 줄에 설 것인지를 결정하라는 협박이 들어 있었다. 이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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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지만 조정의 지원은 사실상 전무하였다. 병사를 모으고 먹이고 입히고, 함대와 무기를 만드는 전쟁 수행의 모든 과정을 스스로 처리해야 하였다. 나라에서 물자를 주지 않으면 백성들로부터 빼앗아 군량미와 병장기를 조달하는 것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동양군대의 전통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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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정점에 있던 선조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한산도 군영이야말로 단순한 지방 군사조직이 아니라 임금의 권위를 갉아먹는 또 하나의 조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왕권수호와 사직(社稷)의 영속성을 최우선시하는 임금에게 한산수국은 잠재적인 도전자였고 백성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는 이순신에게서 질투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였다. 외적(外敵)에 변변히 저항도 못하고 국경으로 달아났던 임금에 비해 이순신의 행적은 너무도 당당하였다. 공고개주(功高蓋主)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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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죽음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분명 음습한 그림자가 발견된다. 특히 손문욱이라는 인물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손문욱이 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정유재란이 발발한 선조 30년(1597) 4월의 일이다. 처음 한동안은 이문욱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성(姓)이 생명만큼 중요하던 시절, 성씨가 오락가락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비밀이 많고 당당하지 못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손문욱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련된 기록을(번잡하기는 하지만)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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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 학습효과’는 고려 조정과 그 뒤를 이은 조선왕조로 하여금 해상세력을 철저하고 교묘하게 탄압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삼별초 소멸 이후 ‘해상왕국’은커녕 ‘해상세력’으로 부를 만한 집단은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할 수 없었다. 약간의 자치권을 지녔던 제주도마저 조선조에 접어들면서 내륙(중앙) 정부의 완벽한 통제 하에 들어갔다. 삼별초 토벌 이후 고려와 조선 조정은 일관되게 해상세력을 거세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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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말미에서 고급 해양문화의 양생(養生)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다로의 진출을 꺼리고 바다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천시했던 조선조의 악습을 이젠 말끔히 지워버리자는 바람에서이다. 해양대국이 된 오늘날에도 바다와 가깝거나 해상과 관련된 일들을 얕잡아 보는 악풍은 온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대착오적인 해양천시 풍조를 없애고 해양문화의 고급화, 해양적인 것의 가치를 회복하는 일, 그럼으로써 경제위기를 극복할 또 하나의 방책을 제시하는 일이야말로 이순신이 ‘수국’을 세운 뜻을 이 시대에 되살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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