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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절대왕정시대

유럽의 절대왕정시대

  • 김장수
  • |
  • 푸른사상
  • |
  • 2011-08-29 출간
  • |
  • 251페이지
  • |
  • 153 X 224 X 20 mm /566g
  • |
  • ISBN 9788956408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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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백년전쟁(1339-1453), 장미전쟁(1455-1485) 등으로 인해 중세정치체제의 근간이었던 봉건제도(feudalism)가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이 제도의 핵심적 축이었던 귀족 및 기사계층의 입지가 장기간 지속된 전쟁으로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봉건제후의 일인자(primus inter pares)로 만족해야만 했던 각국의 군주들은 자신들의 권력증대에 필요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강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기, 신인도항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신대륙에서 금과 은이 대량으로 유럽대륙으로 유입되었고 그것은 가격폭등현상을 초래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이러한 가격폭등현상은 상업혁명(Commercial Revolution)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과도기적 상황 하에서 생산수단을 가진 상인과 수공업자들, 즉 시민계층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이렇게 막대한 부를 축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계층은 자신들의 부를 더욱 늘리려 했고 거기서 국왕과의 연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도 인지하게 되었다. 국왕 역시 자신의 위상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귀족계층과의 무력적 대립에서 승리해야 했기 때문에 시민계층의 경제적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다. 즉 그는 귀족계층과의 대립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상비군체제구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각국의 국왕과 시민계층사이에 제휴관계, 즉 정경유착관계가 구축되었는데 여기서 국왕은 시민계층에게 특허장 발부를 통한 경제적 특권을 보장했고, 시민계층은 국왕에게 상비군체제구축과 유지에 필요한 경비를 약속했다.
에스파냐의 절대왕정체제는 다른 국가들보다 빨리 정립되었는데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시민계층의 형성이 빨랐기 때문이다. 펠리페 2세(Felipe II de Habsburgo) 때 절대왕정체제의 절정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펼친 구교로의 단일화정책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즉 그는 경제적으로 매우 활성화되었던 네덜란드의 신교도들에게 구교로의 개종을 요구했지만 네덜란드 인들은 그러한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펠리페 2세는 이들과 전쟁을 펼치게 되었고 그것은 에스파냐의 국력 및 위상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영국의 절대왕정은 장미전쟁으로 인해 귀족계층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던 헨리 7세(Henry VII)부터 시작되었다. 이후부터 튜더(Tu -dor)왕조의 위정자들은 왕권강화를 위한 정책들을 지속적으로 펼쳤고 그러한 정책들 역시 가시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특히 영국에서는 종교적 요인이 왕권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헨리 8세(Henry VIII)는 재혼을 통해 후계자를 얻으려고 했지만 로마교회는 헨리 8세의 그러한 시도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헨리 8세는 로마교회와 결별한 후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엘리자베스 1세(Elisa- beth I) 때 절대왕정체제의 전성기가 도래했지만 이 인물이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튜더왕조는 단절되었다. 이후 외부로 유입된 위정자들, 즉 스코틀랜드로부터 유입된 스튜어트(Stuart)왕조의 왕들은 영국 의회가 가졌던 제 권한, 특히 과세동의권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그것은 의회와의 빈번한 충돌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국왕과 의회사이의 빈번한 충돌은 결국 청교도혁명을 유발시켰고 그것은 공화정체제를 한시적으로 유입시키기 계기가 되기도 했다. 1660년 왕정체제가 복고된 이후에도 의회의 권한을 무시한 정책이 지속적으로 펼쳐졌기 때문에 의회의 주도로 1688년 명예혁명이 발생했다. 이후 영국에서는 절대왕정체제를 대신하여 의회가 정치활동의 중심역할을 담당하는 새로운 질서체제가 도입되었다. 이 체제하에서 영국의 국왕들은 정치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영국을 대표한다는 상징적 존재로 만족해야만 했다.
앙리 4세(Henri IV)때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프랑스의 절대왕정체제는 루이 13세(Louis XIII)와 루이 14세(Louis XIV) 시기에도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귀족계층의 조직적인 저항들이 나타났는데 그러한 것들은 리슐리외(Richelieu)와 마자랭(Maza- rin)에 의해 제압되었다. 섭정체제를 종식시킨 후 루이 14세는 절대왕정체제를 보다 확고히 하려는 노력을 펼쳤고 마침내 프랑스를 유럽 제 1의 국가로 부각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물은 종교적인 강압정책, 즉 구교로의 단일화정책을 추진했고 거기서 경제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신교도들, 즉 위그노들은 구교로의 개종보다는 국외로의 탈출을 선택했고 그것은 프랑스의 경제적 상황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 했다.
신성로마제국은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지방분권적 성향을 가졌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은 30년종교전쟁(1618-1648)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1648년에 체결된 베스트팔렌(Westfalen)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에는 무려 300여개의 연방과 1,500 개의 기사령(Ritter- gut:중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독일에서 번성한 기사영지 또는 기사농장을 지칭), 즉 1,800 여 개에 달하는 독립 정권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로마제국의 영역 내에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라는 강대국이 등장했고 이들 국가에도 절대왕정체제가 도입되었다. 특히 양 국가에는 계몽절대군주가 등장하게 되는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와 요제프 2세(Joseph II)가 바로 이에 해당된다 하겠다. 그리고 이들 위정자들은 자신들이 신민들의 공복(premier serviteur de l"Etat=erster Diener des Staates)이라고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왕정체제의 근간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독일권에서 서로 우위를 차지하려고 했고 그것은 1740년 오스트리아왕위계승전쟁을 유발시키는 근본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전쟁에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이들 국가와 연계되는 국가들, 즉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도 참여하여 전쟁의 성격은 유럽전으로 확대되었다.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폴란드 왕국은 절대왕정체제가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상태에서 쇠퇴기에 접어드는 특이한 양상이 나타났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스웨덴의 바사(Wasa)가문이 1587년부터 폴란드를 통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귀족들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증대되었다. 1652년부터 제국의회는 만장일치제(libe rum veto; 절대적 거부권)를 채택했는데 그것은 제국의회의 의원 중 1 명이라도 반대할 경우 안건이 통과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따라 제국의회는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후반까지 48번이나 해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인 개혁 역시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 당시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던 폴란드 최고위귀족(Magnate)들은 상호간 동맹 체제를 구축했고 이러한 체제는 종종 외부세력의 영향을 받았다. 점차적으로 폴란드의 국왕 들은 선출되었고 그러한 것은 왕권을 더욱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실제적으로 이 당시 폴란드의 국왕들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처럼 한 국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는데 필요한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 이에 따라 폴란드는 절대왕정체제의 기본적 골격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주변 국가들에게 일방적으로 간섭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그것은 폴란드를 와해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러시아의 절대왕정체제는 표트르 대제((Пётр Великий/Peotr) 때 확립되었다. 그런데 서유럽의 국가들과는 달리 러시아에서는 절대왕정체제에 대한 귀족계층의 조직적인 저항이 매우 미미했다. 절대적 권력을 장악한 표트르 대제는 서유럽의 선진문명을 수용하려고 했고 부동항을 얻으려는 외교정책도 동시에 펼쳤다. 표트르 3세에 이어 러시아의 위정자로 등장한 예카테리나(Екатерина Великая:Ekate- rina II Alexejewna) 여제 역시 황제권 강화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그러나 이 인물은 당시 사회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계층, 특히 농노계층에 대한 배려정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국적 규모의 민란, 즉 푸카초프의 폭동이 발생했다. 이 폭동을 진압한 이후 이 인물은 그동안 펼쳤던 계몽주의적 정책을 포기했다.
유럽의 대다수 국가들이 도입한 절대왕정체제는 자체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사회성원 모두의 관점내지는 이익을 정책에 반영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점차적으로 절대왕정체제의 문제점을 해결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고 거기서 인간의 이성(ratio)을 강조하는 계몽사상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계몽사상에서는 이성에 따라 세계가 창조되었고 그 규율 역시 인식할 수 있다는 주장이 펼쳐졌다. 이에 따라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이성이 강조되었고 자연법 역시 기존의 국가질서체제를 비판하게 되었다. 이 당시 계몽사상을 추종한 사람들은 자연법을 신이 초기에 만든 것으로 이해했다. 아울러 이들은 낙천적인 진보를 믿게 되었고 점차적으로 신, 국가, 그리고 사회의 새로운 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신은 이성의 원천이고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 계몽주의의 기본적 입장이었다. 여기서는 신이 이성 법칙에 따라 세계를 창조했기 때문에 그가 자연법을 변경하는 것처럼 극히 일부만이 변경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여기서 계몽사상가들은 인간의 선함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법적 또는 능력적인 면에서도 동일하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아울러 이들은 이성에 대한 무시가 수백 년 간 지속되었기 때문에 인류는 아직까지도 미성년적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관점도 피력했다. 또한 이들은 만일 인간을 이성적으로 대우한다면 이들은 자유롭게 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진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는 입장도 밝혔다. 이제 사람들은 권력 분산을 통해 사회성원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질서체제의 확립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추천의 말]

막대한 부를 축적한 시민계층은 자신들의 부를 더욱 늘리려 했고 거기서 국왕과의 연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도 인지하게 되었다. 국왕 역시 자신의 위상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귀족계층과의 무력적 대립에서 승리해야 했기 때문에 시민계층의 경제적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다.

유럽의 대다수 국가들이 도입한 절대왕정체제는 자체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사회성원 모두의 관점내지는 이익을 정책에 반영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점차적으로 절대왕정체제의 문제점을 해결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고 거기서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계몽사상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 본문중에서


목차


머리말

제1장 절대왕정체제의 특징 및 이론적 토대
1. 절대왕정체제의 등장요인
2. 절대왕정체제의 특징
3. 절대왕정체제의 이론적 토대정립

제2장 에스파냐의 절대왕정시대
1. 펠리페 2세
2. 펠리페 3세
3. 펠리페 4세
4. 카를로스 2세

제3장 네덜란드의 등장
1. 에스파냐의 대 네덜란드 압박정치
2. 위트레흐트(Utrecht)동맹체제의 결성과 독립전쟁
3. 독립이후의 상황

제4장 영국의 절대왕정시대
1. 헨리 8세
2. 에드워드 6세
3. 메리
4. 엘리자베스 1세
5. 제임스 1세
6. 찰스 1세
7. 청교도혁명
8. 찰스 2세
9. 제임스 2세와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

제5장 프랑스의 절대왕정시대
1. 앙리 4세와 낭트칙령
2. 루이 13세
3. 루이 14세

제6장 30년전쟁(1618-1648)
1. 전쟁발생 이전의 상황
2. 유니온과 리가의 대립
3. 덴마크와 스웨덴의 개입
4. 프랑스의 개입
5. 평화협상
6. 전쟁의 결과와 후유증

제7장 프로이센의 절대왕정시대
1. 프리드리히 빌헬름
2. 프리드리히 1세
3.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4. 프리드리히 2세

제8장 오스트리아의 절대왕정시대
1. 마리아 테레지아
2. 요제프 2세

제9장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과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식민지전쟁
1.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에 대한 각국의 반응
2. 프로이센의 선제공격
3. 마리아 테레지아의 대응
4. 아헨 임시평화조약
5. 카우니츠-리트베르크의 외교정책
6. 프리드리히 2세의 군사적 대응
7. 러시아에서의 황제교체
8.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식민지전쟁
9. 후베르투스부르크 평화조약

제10장 폴란드의 쇠퇴와 분할
1. 폴란드 왕국의 쇠퇴
2. 선출왕제의 도입과 후유증
3. 폴란드 왕국의 분할

제11장 러시아의 절대왕정시대
1. 러시아 제국의 등장
2. 표트르 대제
4. 예카테리나 2세

제12장 절대왕정시대의 사회적 제 현상

제13장 절대왕정체제의 문제점부각: 계몽사상의 대두
1. 절대왕정체제의 논리적 모순과 계몽사상의 대두
2. 계몽사상가
3. 계몽사상의 이행 : 개혁이 아닌 혁명적 방법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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