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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연인

공작가의 연인

  • 진설
  • |
  • 플레이블(예원북스)
  • |
  • 2018-10-15 출간
  • |
  • 488페이지
  • |
  • 148 X 210 mm
  • |
  • ISBN 9791189450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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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책속으로 이어서]

#1. 왜 그 아이를 찾으려 했던가.

1863년 어느 늦은 밤. 사방이 어둑한 복도에 작은 램프 등을 들고 조심스럽게 걷는 사내가 있었다. 육중한 체격의 그는 어느 단정한 방문 앞에 이르자 발길을 멈추며 공손히 뒤돌아섰다.
“공작님, 부디 좋은 시간 되십시오.”
공작이라 불린 신사는 귀찮은 기색으로 사내의 인사를 받아준 뒤 방문을 열었다.
방 분위기는 그의 취향이 아니었으나 비교적 깔끔했고 프리지어 향이 느껴졌다.
하룻밤 묵는데 이 정도면 나쁘지 않군.
신사는 묵묵히 안으로 들어가 외투를 벗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라미온 국의 훤칠한 젊은 공작, 쥬벨 트레비시는 말끔히 정돈된 짙은 머릿결에 오뚝한 콧날이 시원스레 돋보였다. 또렷한 입술은 다소 날카로운 인상을 부드럽게 풀어주었으나 굳게 다물고 있어 다부진 느낌이었다. 눈을 감고 누워 있음에도 그만의 강인하면서도 귀족다운 우아함을 동시에 풍기고 있었다.
쥬벨은 이곳에서 머무는 일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영 내키지 않던 방문이라 언짢은 표정이 되어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 이윽고 잠을 청했다.
“……저…… 기.”
의식이 몽롱해지는 순간 어렴풋한 음성이 들려왔다.
쥬벨은 번쩍 눈을 떴다.
“누구냐?”
그가 재빨리 일어나 앉았다. 예민하게 치켜뜬 두 눈이 날카로웠다.
“저는…….”
문가에서 들리는 가녀린 목소리에 쥬벨은 미간을 좁히고 그곳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사람 형상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커다란 눈망울의 소녀가 구석진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언제 들어온 것이냐?”
묻고 있는 쥬벨은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 방에서 공작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를 기다렸다고?”
그가 작게 되뇌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문가에 숨죽이고 있어 몰랐던 건가.
“주인님이…… 공…… 작님을 모시라 하셨습니다.”
루시아는 미동도 없는 공작을 바라보며 숨을 삼켰다. 그러곤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역시 그 뜻이었군.
쥬벨의 입술이 삐딱해지더니 눈가에 몰린 경계심을 풀었다.
“네 주인이 괜한 짓을 하는군. 됐으니 물러가거라.”
쥬벨은 방으로 안내하던 주인의 얄팍한 속내가 한심해 더는 말도 섞기 싫었다. 그가 냉정하게 돌아누웠다.
루시아는 초조한 듯 불안한 시선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게…… 그럴 수 없습니다…….”
애처로운 속삭임이 거듭 울렸으나 쥬벨은 짜증스러워 한숨만 나왔다.
“그럴 수 없다니? 나를 모신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 아닐 테고, 설마 사내 품이 그리운 것이냐?”
마지못해 몸을 일으키는 쥬벨에게 비웃음과 비아냥이 쏟아졌다.
루시아는 눈시울을 붉힌 채 움찔했다. 이내 방 안엔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왜 말이 없지?”
“아, 아닙니다. 저는 그런 뜻으로 온 게 아니라…….”
루시아는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다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럴 수 없다, 그런 게 아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내가 안아주길 바란다면 아양이라도 떨어야 할 것이 아니더냐?”
“그, 그게, 흑…….”
조롱처럼 계속되는 빈정거림은 끝내 루시아를 흐느끼게 했다.
쥬벨은 여자를 믿지 못했다. 더구나 무언가 숨은 의도를 가지고 사내 품으로 안겨드는 여인은 더욱 질색이었다.
“왜 우는 거지? 여자의 눈물은 남자를 약하게 만들지. 하지만 내겐 결코 통하지 않을 게다!”
쥬벨의 날 선 음성이 싸늘하게 퍼지자 루시아가 얼른 숨소리를 죽였다. 그녀는 공작의 기분이 상하는 걸 원치 않았다.
“죄송합니다. 저, 저는 절대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다만, 무엇이냐?”
“히든 부인께 보답을 못 할까 봐 두려운 마음에 그만…….”
보답이라…….
쥬벨은 잠시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짓을 했다.
“이리 가까이 오라.”
“네? 네…….”
그가 조금은 누그러진 말투를 보였다.
그러나 루시아는 여전히 딱딱한 음색이라 소름이 돋았다.
그녀가 쥐고 있던 드레스 자락을 놓고 공작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부인에 대한 보답이라니, 무엇에 관한 보답이지?”
루시아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긴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흘러내린 채였다. 그녀가 질문에 차분히 대답했다.
“히든 부인께서는 어린 저를 거두어주셨고, 지금까지도 가난한 저희 가족을 돌봐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언제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조금이라도 그 은혜에 보답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쥬벨은 몸을 가늘게 떨면서도 또박또박 자기 의지를 전하는 루시아에게 갑자기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게다가 꿍꿍이가 빤히 보이는 이곳 주인이 아닌, 부인에 대한 고마움으로 자신을 모시려 했다는 점도 다소 흥미를 끌었다.
“좋다. 네 뜻이 그렇다면…… 안아주지. 고개를 들어보아라.”
루시아는 간신히 끌어낸 긍정적인 대답이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사실 그녀는 어렵기만 한 윌 히든의 명을 받고 겁에 질렸었다.
모르는 남자를 모신다는 건, 순탄한 여자로서의 삶이 끝나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아내의 과거를 속 좋게 이해해 줄 남편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루시아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히든 부부는 루시아의 양부모였다. 윌은 양부이기 이전에 주인이었고, 새 가족이 된 이후로 친가족의 생계를 책임져 주는 분이었기에 윌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해서 늘 다정했던 마리 부인을 떠올리며 양어머니에게 보답하겠다는 마음으로 추슬렀다. 하지만 방에 들어서기까지 두렵고 두려웠었다.
루시아는 이렇게 공작을 뵙고 원하는 답을 듣고 나자 문득 홀로 불안에 떨었던 시간이 뇌리에 스쳤다. 공작을 기다리는 동안 이 방을 얼마나 뛰쳐나가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늙은 놈팡이는 아니어서 다행이네.”
친언니처럼 가깝게 지내는 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루시아의 처지를 잘 아는 앤이 애써 웃는 얼굴로 했던 농담 섞인 말이 계속 맴돌았다.
루시아는 흔들리는 마음을 잡듯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치맛자락만 만지작거렸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긴 기다림 끝에 쥬벨을 마주하게 됐다.
루시아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심장이 튀어나올 듯 거세게 뛰었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며 저도 모르게 공작을 확인했다.
그에게 커다란 후광이 감돌아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동시에 너무도 수려한 외모에 놀라 숨이 턱 막혀왔다. 하지만 공작이 내뿜는 냉기는 그를 바라보며 울렁였던 그녀의 마음을 금세 얼어붙게 했다.
루시아는 공작의 말대로 천천히 고개 들었으나 그를 똑바로 바라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쥬벨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쪽 눈썹을 세웠다.
“일어나거라. 내가 일일이 명령을 내려야 하는 것이냐? 안아주겠다 하면, 그다음부터는 네가 알아서 해야지.”
귀찮은 듯 못마땅해하는 그가 퉁명스레 말했다. 그러자 움찔 굳은 루시아가 어정쩡하게 일어났다. 별안간 쥬벨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잠깐! 왜 이리 작지? 난 이런 취미는 없는데…….”
불쾌감을 드러내는 낮은 목소리였다.
루시아는 긴장해 멋대로 꼬이는 숨결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아닙니다. 전 어리지 않아요. 올해…… 성년이 되었습니다.”
“정말이냐? 내일이면 바로 알 수 있다. 뻔한 거짓말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예.”
루시아는 일을 망칠까 봐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소 안심한 그녀가 몇 걸음 다가섰다. 루시아의 키는 침대에 앉아 있는 쥬벨의 키와 엇비슷했다.
마른 숨을 꿀꺽 삼키는 루시아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그의 얼굴로 입술을 가져갔다.
쥬벨은 두 눈을 꼬옥 감은 채 동그랗게 모은 입술로 다가오는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잠깐 그녀가 귀엽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이런 자신이 어이없는 듯 그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말려 올라갔다.
그가 붉은 입술에 위치를 맞춰주자 루시아는 마주 닿은 감촉에 흠칫했다.
뭐야?
쥬벨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입술을 갖다 대던 그녀가 입맞춤하듯 입술을 살며시 댔다 떼어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쥬벨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냐?”
“키, 키스를…….”
루시아는 갑작스러운 타박에 화들짝 놀랐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몸을 떨었다.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는 쥬벨의 눈매가 진지해졌다. 갑자기 팔을 뻗은 그가 순식간에 그녀의 허리춤을 감아올려 침대 위로 눕혔다.
루시아는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소리도 못 지르고 그대로 눕고 말았다.
“보아하니 넌 경험이 없는 게로구나.”
그녀를 내려다보는 쥬벨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술을 비틀었다.
“죄, 죄송…… 합니다.”
루시아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부끄러운 마음에 눈을 꼭 감았다.
“신경 쓸 거 없다. 첫 경험을 좋아하는 사내도 있으니까.”
변함없는 그의 비아냥은 그녀를 괴롭혔다. 루시아가 몸을 바르르 떨고 있는데 무심히 와 닿는 손이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돌려놓았다.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뜨고 공작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그의 입술이 다가오는 게 보이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민망했다. 다시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공작의 입술은 딱딱한 말투와 다르게 부드럽고 따뜻했다. 하지만 루시아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곤혹스러웠다.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냐?”
쥬벨은 놀라운 표정을 풀지 못하면서도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당연히 거짓일 거라 단정했었다.
루시아는 스스로가 두려움과 싸우며 여기까지 이끌어낸 상황이니 침착하려 노력했다. 그렇지만 심장까지 파고드는 창피함에 눈물을 글썽였다.
쥬벨이 미묘한 표정 변화를 일으켰다. 그의 얼굴이 서서히 내려가더니 루시아에게 고인 눈물을 핥았다.
가만히 숨죽이고 있던 루시아는 예상치 못한 행동에 놀라 동그랗게 뜬 눈으로 쥬벨을 마주했다.
“짜군.”
서늘한 눈빛으로 중얼거리던 그의 입술이 덮쳐 왔다. 이어 격렬해지는 키스는 루시아의 혼을 뒤흔들어놓기 시작했다.


목차


프롤로그
1. 왜 그 아이를 찾으려 했던가
2. 맑게 웃는 사람이었구나
3. 이리 두고 싶지 않아
4. 잠은 다 잤군
5. 너무 예쁘게 꾸민 거 아니야
6. 날 어떻게 생각하지
7. 떨린다던 심장은 여전한가
8. 놓치고 싶지 않아
9. 예뻐서 그러지. 싫은가
에필로그
외전 1. 언제부터였어요
외전 2. 대가족이 되려나 봐요
외전 3. 재미있는 얘기 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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