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 트레이더, 식량 전쟁터의 중심에서 곡물을 거래한다
외환 트레이더나 채권 트레이더는 얼핏 들어봄직 한데 ‘곡물 트레이더’라는 말은 조금 낯설다. 저자 역시 명함이나 이메일에 트레이더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도 스스로를 영업사원이라 말하기도 했다.(84쪽) 석유 트레이더, 철광석 트레이더처럼 원자재 시장에서도 통용되는 호칭 ‘트레이더’란 무엇일까? 저자는 ‘리스크를 관리하면서 상품을 사고파는 행위를 반복하여 이익을 만들어내는 존재’라 정의한다. 그리고 하나의 거래를 성사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과정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한다. 시장 조사부터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 거래선 간 의견 조율, 주문, 분쟁에 대한 대응까지 본인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트레이더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곡물 트레이더’는 전 세계 곡물 시장에서 거래를 진행한다. 영화 설국열차를 본 이들은 기억할 것이다. 열차 끝 칸 사람들의 유일한 식량이었던 ‘단백질 블록’을 말이다. 거무튀튀한 양갱처럼 생긴 그것의 재료가 바퀴벌레였다는 것이 당시에는 충격이었으나 언젠가부터 한국에도 식용 곤충 요리를 판매하는 식당들이 생겨났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인구 수, 지구의 한정된 자원의 고갈 탓에 식량이 부족해질 수도 있다는 공포와 함께 세계는 지금 식량 전쟁터에서 살아남고자 발버둥 치고 있다. 특히 대다수 문화권의 주식인 곡물은 인간의 생존과 역사를 함께 해왔고 지금 이 전쟁에서의 핵이기도 하다. 눈 떠서부터 감을 때까지 그 핵을 다루고 오대양 육대주를 제집처럼 넘나들며 곡물 거래를 성사시키는 사람, 곡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 나서는 사람이 바로 곡물 트레이더다. 전 세계 모든 나라가 일터인 트레이더는 실시간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브라질 트레이더와 소통하고, 갑작스럽게 발생한 비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당장 내일 비행기를 타고 타국으로 향하기도 한다. 역동적인 그의 경험담을 따라가다 보면 트레이더의 낮과 밤이 머릿속에 그려질 것이다.
상사맨이 가는 곳에 경계란 있을쏘냐
저자가 현재 다니고 있는 싱가포르 현지의 트레이딩 회사는 거래 성사에 필요한 많은 일들을 부서별로 나누어 진행하며 트레이더는 거래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곡물 트레이딩을 하는 한국의 종합상사는 또 다르다. 저자의 첫 직장은 한국의 종합상사였다. 이곳은 하나의 곡물 사업을 담당하게 되는 상사맨에게 계약 성사뿐만 아니라 문제없는 마무리까지 A부터 Z에 해당하는 전 과정을 홀로 처리하게끔 한다. 보통 다른 회사라면 여러 부서가 나누어 처리했을 일들이다. 많은 일을 책임지고 도맡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덕에 직원 개개인이 전 영역에 고른 지식을 갖출 수 있(94쪽)다.
상사맨의 큰 자랑 중 하나는 잦은 출장이다. 취업은 한국에서 했지만 출근은 해외로 하는 격이다. 호주의 너른 밀밭을 지나 자일스 항구로, 인도의 다양한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남쪽 첸나이와 북쪽의 델리로 동분서주 오가며 고루 습득한 체험은 쌓이고 쌓여 10년 가까이, 혹은 그 이상 일한 상사맨을 본인이 담당하지 않는 분야의 실질적인 정보까지 꿰고 있는 전문가로 만든다. 요르단에서 온 손님이 한국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무엇인지 등의 깨알 같은 정보를 자기도 모르는 새 머릿속에 입력하고 있는 식이다. 이동 반경만큼이나 시야가 넓어지는 체험을 매일 하는 이들이다.
불과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종합상사는 한국 경제 성장의 주역이었고 ‘상사맨’이 최고의 직업으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종합상사는 외환 위기를 딛고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에너지 자원을 개발하고, 해외 농장을 개발하는 등 적극적으로 새로운 사업,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가며 오늘날 여전히 우리 산업계의 한 축을 이끌어가고 있다. 대학에 진학하는 것부터 취업, 술자리, 야근 등 매번 답답한 규제에 부딪치는 한계의 땅이자, 금융과 회계를 몰라도 상사맨이 될 수 있는 기회의 땅이기도 한 대한민국이기에 가닿을 수 있는 큰 꿈과 더 넓은 세계가 있다. 끊임없이 뻗어 있는 그 길을 따라 상사맨은 오늘도 비행기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