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대가 된 지금,
우리 아이들은 어떤 공간에서 공부하고 있을까?
초가집이 늘어서 있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학교는 동네에서 가장 근사한 건축물이었다. 시설도 가장 양호했다. 그 후 급격한 근대화?산업화를 겪으면서 학교보다는 집이 훨씬 편안하고 안락한 공간으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근대화?산업화 속도만큼은 아니지만 삶의 공간으로서 집과 일터의 환경적 조건에 대한 사람들의 감수성이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러나 집과 사무실이 오랜 시간을 두고 공간에 대한 인식과 감수성을 키워가는 동안 학교는 꼼짝하지 않았다. 학교는 동네에서 가장 괜찮은 건축물의 지위를 상실하다 못해, 오히려 집이나 사무실보다 낡고 볼품이 없어졌다. 안전하지도 않으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다. 학생에게나 교사에게나 학교는 어쩔 수 없이 버텨야 하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학교의 주인은 누구인가?
- 비민주적인 공간에서 민주시민 교육을 하는 아이러니
학생에게든 교사에게든 학교는 집 외에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지만, 누구에게도 삶의 공간을 제공하지 못하는, 가장 치명적이고 불쾌하며 비인간적이며 비민주적인 공간이다.
학교공간에는 표정은 없고 계몽적 구호만 넘친다. 건물 안부터 밖까지 ‘○○한 인간 육성’, ‘쓰레기를 버리지 말자’, ‘담배를 피우지 말자’, ‘복도에서 뛰지 말자’ 등과 같은 메시지를 담은 계몽과 금지의 구호가 넘쳐난다. 건물 밖 담벼락에는 학교에서 내 건 온갖 종류의 학교 홍보용 현수막이 나부낀다. 마치 학교공간이 구호와 계몽의 거대한 전시장 같은 전근대 풍경을 연출한다. 그러나 정작 학생이나 교사들이 마음껏 삶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누릴 공간은 손바닥만큼도 없다. 심지어 근래에는 ‘공동체의 약속’이라고 이름 붙인 새로운 규칙까지 등장했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 따르고 지켜야 할 규칙이 많아진다는 것은 공동체의 질서를 강조하며 촘촘하게 길들이는 교육을 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렇듯 학생을 관리와 지도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낡은 교육관을 고집하는 학교에서 학생들의 삶이 가능할 리 없다. 기존의 교육개혁이 교수?학습 활동의 개선에 주로 관심을 가졌다면, 공간을 통한 학교개혁은 그 공간에 정주하는 학생들이 먹고, 자고, 놀고, 공부하는 생활공간임을 염두에 두는 개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