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성찰적 사유의 전통을 잇다
이 책은 기존의 동아시아 사유가 탈문맥성, 몰현재성, 사대주의의 그늘 아래 고고학적 유물처럼 다루어지고 있다는 날선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는 ‘인문학의 위기’와 흐름을 같이한다. 저자가 보기에 인문학의 위기는 안으로 반성하고 밖으로 관찰하는 성찰 행위에 충실하지 못해서 생겨났는데, 이러한 성찰의 결여는 우리 성찰의 토대이자 ‘문사철’ 구분없는 통합적 사유의 유전자를 간직해온 동아시아 사유의 전통이 단절된 데서 비롯한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인문정신을 제대로 회복한다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성찰의 인문학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처방이다. 이를 위해 경전에 대한 전통적 훈고학이나 서구 사조에 대한 무반성적 추종이라는 양극단을 모두 거부하고, 동아시아의 전통 사유에 현대의 서구 사조를 접목한 여러 독창적 아이디어들을 펼치며 그러한 방식의 잠재력을 보여준다.
예컨대 《논어》를 통해서는 1, 3인칭이 주류를 이루어온 서양의 사유와 동아시아의 2인칭적 사유를 구별한 뒤 각각 동서양의 사상사에서 어떤 모습으로 전개되었는지 살펴보거나(1장), 수리논리학과 분석철학의 기법을 동원해 주희와 율곡을 둘러싼 기존의 해석들을 반박하며 이(理)와 기(氣)에 대한 새로운 논제를 이끌어내는가 하면(2장), 《장자》 속에서는 장자의 자연주의와 데리다의 해체주의의 만남을 통해 해체주의와 자연주의 개념이 대립이 아닌 조화를 이룬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5장).
또한 조선왕조 500년을 지배한 주자학에 반기를 든 정약용의 텍스트를 읽는 여러 방법론도 제시한다. 정약용은 유학 전통의 진정한 계승자이자 오늘날 동아시아 사유의 계승에서도 모범이 된다고 주장하고(7장), 특히 정약용의 사유에서 찾아낸 ‘성의(誠意)’는 내적 도덕과 외적 윤리를 모순 없이 통과하는 일관성의 행위 원칙이며, 이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전통의 초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대학》을 둘러싼 주희와 정약용의 상반된 해석과 경합은 동아시아 경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한다(8장).
크로스오버, 독주가 아닌 합창을 위하여
이 책에서 이루어지는 철학, 인문학, 과학의 크로스오버적 대화와 토론은 저자가 오랜 고민 끝에 다다르게 된 적절한 상동성(上同性)과 상사성(相似性)에 기반을 둔다. 이때 적절하다는 것은 완벽하게 같지도, 대화가 불가능할 만큼 다르지도 않다는 뜻이다. 이로써 서양의 현전(現典)인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 데리다, 들뢰즈의 사상과 동아시아의 고전(古典)인 유가, 불교, 도가는 서로 공감할 수도 있고 비판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를 통해서는 동과 서(부처와 헤세), 현실과 허구(실제 역사적 인물과 소설 속의 인물), 과거와 현재(부처의 설법과 헤세의 관점)가 서로 교차하면서 윤회와 자아, 탐구의 논리, 차이와 반복, 시간과 지속 등의 철학적 주제들이 어떻게 공유되고 생산적 담론을 형성하는지 살핀다(3장). 또한 수리논리학과 분석철학의 기법을 동원해 원자론적 사유가 추구하는 단순성과 상호 독립성의 양립 불가능함을 증명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과 용수가 마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아울러 이들의 사유가 논리학의 삼대 원칙으로 여겨진 동일률, 배중률, 모순율을 어떻게 극복하고 어떤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내는지 텍스트를 넘나들며 논증한다(4장).
도저히 한곳에서 볼 수 없을 것 같은 네 사람, 들뢰즈, 보어, 노자, 장자의 만남도 이루어진다. 저자는 노자의 텍스트에서 찾은 ‘혼(混)’과 ‘충(蟲)’을 들뢰즈가 말한 차이의 카오스(혼돈)에 견주는가 하면, 장자의 텍스트에서 찾은 ‘휴(虧)’를 양자역학 속 파동함수 붕괴에 견준다. 이를 통해 존재 사태의 은폐와 탈은폐 사건에 대한 형이상학을 구상하며, 삶의 매순간, 즉 기억과 생각과 깨달음과 행위와 사건의 매순간이 붕괴의 과정이며, 삶은 그 붕괴의 리듬으로 점철된 드라마라는 점을 깨닫는다(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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