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이후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며,
지난 30년간 우리 사회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오롯이 노력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야기!
“‘민주변호사 협의회!’
‘민주화보다 민주사회가 낫지 않을까?’
다시 30년 전의 그날 아침으로 돌아가 본다. 기대와 열의가 유달리 컸던 탓인지, 새로운 단체의 이름을 짓는 일은 수월하지 않았다. 칠판에 하나 둘씩 후보가 될 만한 이름이 올랐다. ‘민주변호사회’, ‘민주변호사협의회’에서 시작된 논의는, 이름의 들머리를 ‘민주’로 할 것인지, ‘민주화’로 할 것인지로 옮겨갔다.”
-<들어가는 말> 중에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MINBYUN-Lawyers for a Democratic Society)은 우리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증진을 위하여 모인 변호사들이 1988년 5월 28일 창립한 단체이다. 이후 민변은 창립 이전부터 수행해왔던 양심수, 시국사건의 변론이나 사법감시 활동을 넘어서서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기 위한 각종 공익소송, 입법 및 정책 제안으로 그 범위를 넓혀갔다. 현재 사법감시, 노동, 언론과 교육, 여성, 아동, 환경, 민생, 소수자, 평화와 통일, 국제통상, 과거사 청산 및 사이버 정보인권, 국제연대 분야에서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1988년 창립 이후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은 민변은 이제 앞세대가 공히 역사가 되고 새로운 세대가 채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10년 단위로 백서를 작성하여 조직의 변화와 주요 사업내용을 기록으로 남겨놓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른 주요 활동을 일관된 흐름 속에서 바라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51명으로 시작해 이제 회원 수가 1,100명이 넘는, 스무 배가 넘게 성장한 조직에서 그 역사를 오롯이 다 알고 있는 민변의 젊은 세대들도 드물어졌다. 그래서 다음 세대가 민변을 세운 선배들의 정신을 오롯이 잇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간의 활동을 정리한 30년사를 발간하게 되었다.
민변은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뒤이은 노동자 대투쟁이 일으킨 민주화의 열망을 배경으로 태어났다. 지난 30년은 우리 사회에 성숙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더 많은 인권의 목록을 보태려는 분투의 시간들이었다. 물론 그러한 노력이 모두 그때마다 빛나는 성과로 바로 이어진 것만은 아니다. 대표적 악법으로 지목했던 국가보안법은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에는 더욱 기승을 부리기도 하였다. 환경소송 등 주요한 소송에서 자주 패소하면서 훗날을 기약해야 했다. 그러나 끝내 민변의 변호사들이 법정과 거리에서 외쳤던 주장이 옳았음을 지난 역사는 보여줬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쉼없이 걸어온 30년,
새로운 30년을 준비하며 뚜벅뚜벅 걸어가겠습니다!
제1장 반독재화의 길 위에서
민변의 활동 중 가장 주요한 공익변론과 입법감시, 사법개혁과 감시에 관한 부분을 담았다. 민변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변론해왔으며, 초기에는 노동자, 농민, 학생, 재야운동가들에 대한 변론에 집중되었으나 점차 시민들, 사회운동단체들과 함께하는 기획소송으로, 소송의 기획과 시민
교육을 전담하는 공익인권변론센터의 설립으로 발전했다.
민변이 설립된 이유 중 하나는 개개의 변호사들이 할 수 있는 변론을 뛰어넘는 입법감시활동에 있었다. 1989년 『반민주악법 개폐에 관한 의견서』를 최초의 발간물로 펴낸 이래 꾸준히 법률과 제도의 개혁에 목소리를 높여왔다. 2000년대에 들어서부터는 권력의 교체시기에 맞춰 「한국사회의 개혁과 입법과제」를 제시하였으며, 한국인권보고대회를 개최하여 그 해의 인권상황을 점검하고 개선을 촉구해왔다. 법원과 검찰의 개혁은 변호사 단체인 민변이 최고의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과제이다. 최고법원 구성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사법절차에서 인권을 보장하고자 사법감시와 사법개혁에 민변과 회원들이 참여한 역사도 정리해보았다.
제2장 시민 속으로 더 넓게 더 깊이
민변활동의 큰 모토인 ‘시민들과 함께하는 변호사들’의 활동을 세 가지 주제로 정리했다. 먼저 노동인권을 보호하는 노동변호사들의 활동이다. 단순히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 노동자와 함께하고자 하는 변호사들의 활약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양심수 변론에서 시작된 인권옹호는 빈곤층과 중소상공인과 같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민생을 회복하고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활동으로 범위를 넓혔다. 특히 이명박 정부 시절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에 나섰던 시민들과 함께 10만인 쇠고기 수입 고시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하고 1,000명에 가까운 시민들에게 무료변론을 했던 경험은 민변을 시민과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 그 특별했던 경험을 정리하였다.
제3장 평화와 통일을 위한 큰 길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민변이 수행해온 역할을 살펴보았다. 변호사들이 미군 문제를 연구하고 대응하는 것은 곧 인권과 주권을 옹호하여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싸움도 마찬가지이다. 헌법이 보장한 사상의 자유, 언론?출판?예술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는 토대가 되었던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도 민변이 창립 초기부터 집중해온 활동이었다. 분단과 독재의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발생했던 인권유린의 과거사를 청산하고 정의롭고 밝은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활동도 민변에게는 빠질 수 없는 일이었다.
제4장 연대로 강해지는 인권
민변의 활동이 우리 사회 소수자인 여성과 환경, 국제사회로 뻗어나간 역사를 ‘연대’의 역사로 정리하였다. 창립 초기 극소수였던 여성회원들은 점차 늘어났고, 민변 역사에서 빛나는 성과인 호주제 폐지를 끌어냈습니다. 여성의 인권을 외치던 목소리는 장애, 성소수자, 이주 인권으로 번지며 커져왔다. 민변의 회원들은 자연과의 공존을 위해 환경단체들과 연대하여 각종 환경 관련 소송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입법활동은 물론, 때로는 현장에서 활동가들과 함께 직접 싸우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보편적 인권의 개념을 연구하고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와 연대하여 한국의 인권상황을 높이는 여러 활동에 민변이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정리하였다.
[책속으로 추가]
이명박·박근혜 정부 이후에는 노동입법과 관련된 싸움은 다른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남아 있던 노동자 보호 규정들을 더 나쁜 방향으로 개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먼저 기간제법 시행 이후 2년이 되는 2009년 7월 1일이 다가오자 ‘100만 실업대란설’을 내세우며 기간제 사용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고, 파견법 적용대상을 확대하는 개악을 시도했다. 이에 민변 노동위원회, 노동인권 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법률위원회 회원을 포함한 395명은 29일 환경노동위원회에 입법 의견서를 내고, 국회 앞 1인 시위와 릴레이 단식에 나섰다. 다행히 기간제법과 파견법의 개악시도를 저지할 수 있었다.
-본문 118-119쪽
시민들의 비판과 저항이 들불처럼 퍼져 나갔지만 이명박 정부 역시 멈추지 않았다. 5월 29일 농림식품부 장관은 ‘미국산 쇠고기 및 쇠고기 제품 수입 위생조건 고시’의 관보게재를 의뢰하였다. 답답함을 느낀 시민들은 민변으로 연락해서 고시의 효력을 박탈할 수 있는 법적 대응방법을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법률지원단 안에서도 홈페이지를 이용한 대규모 집단소송을 통해 시민들로 하여금 의사표현의 분출구를 열어주고 소송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가 될 수 있는 기획을 해보자는 의견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제껏 민변이 진행한 전례가 없는 대규모 집단 소송의 기획이었다.
5월 30일 민변은 홈페이지를 통해 헌법소원 참가인을 공개모집하였다. 참가자에게는 5,000원의 참가비를 받기로 하였다. 참가비는 헌법소원 진행비용으로 우선 사용하고 남으면 촛불 문화제로 인해 형사재판을 받는 시민들에 대한 변론비용으로 사용하겠다고 알렸다. 처음 예상하기에는 많아봤자 수천 명 정도가 참여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홈페이지를 열자마자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공개모집 한 시간 만에 100여 명이 참여하였고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참여의사를 밝혀왔다. 소식이 인터넷을 타고 퍼져나가면서 홈페이지가 다운될 지경에 이르렀다. 마감시각이었던 6월 3일 밤 12시까지 전산망으로 참여의사를 밝힌 사람은 무려 103,476명이었다. 우리 사법 역사상 최대 규모의 청구인이었다.
-본문 176-1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