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페미니스트 작가 나혜석이 100년후 독자에게 묻는다. 한 세기 전의 자신의 주장이 지금도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과격한가고.
정조는 취미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 남의 정조를 유인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 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 -「이혼 고백장」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떡 먹고 싶을 때 떡 먹는 것과 같이 임의용지任意用志로 할 것이요,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을 것이 아니다.” -「신생활에 들면서」
‘정조의 해방’을 주장한 글이다. 봉건질서에 쩔어 있던 시기였던 만큼, 세상이 뒤집어질 만한 사건이었다. 「이혼 고백장」을 통해 여성만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를 통렬히 비판한 데 이어 나혜석은 3·1만세운동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에게 정조유린죄 소송을 제기하였다. 나혜석의 행동은 당시 사회에서는 금기였다. 세상은 그에게 손을 내밀기는커녕 손가락질하고 저주하였다. 욕을 하기는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거의 재기할 기분이 없을 만치 때리고 욕하고 저주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필경은 같은 운명의 줄에 엉키어 없어질지라도 필사의 쟁투에 끌리고 애태우고 괴로워하면서 재기하려 합니다.” -「이혼 고백장」
우리는 인형이 아니다
나혜석은 동경에 유학하던 십대 후반부터 이미 선각자로서 여성해방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어왔다.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기뻐하듯/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남편의 아내 인형으로/그들을 기쁘게 하는/위안물 되도다/노라를 놓아라/최후로 순수하게/엄밀히 막아놓은/장벽에서/견고히 닫혔던/문을 열고/노라를 놓아주게
1921년 『매일신보』에 실린 나혜석의 시다. ‘노라’는 여성 해방의 상징이다.
“여성을 보통 약자라 하나 결국 강자이며, 여성을 작다 하나 위대한 것은 여성이외다. 행복은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그 능력에 있는 것이외다. 가정을 지배하고, 남편을 지배하고, 자식을 지배한 나머지에 사회까지 지배하소서. 최후 승리는 여성에게 있는 것 아닌가.” -「이혼 고백장」
이처럼 열정적으로 여성해방을 외치던 나혜석은 끝내 세상의 거대한 벽 앞에 좌절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