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미하며 즐긴다!
혼술, 홈술의 시대에 돌아온 올드보이
이제는 잔술 시대다. 궤짝 째 놓고 소주를 마셨다는 무용담이나 사회생활을 하려면 술을 잘 마셔야 한다는 속설은 점점 초라해지고 있다. 술을 취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즐기기 위해 마시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우리 음주 문화도 개성과 취향의 추구로 변화하는 추세다. 관련해 ‘혼술’ ‘책맥’ ‘홈술’ 등 한 잔을 놓고 즐기는 음주 문화가 떠오르고 있고, 주류 시장에서도 크래프트 맥주를 시작으로 싱글몰트 위스키를 거쳐 각자의 취향과 기호를 중시하는 칵테일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칵테일위크&위스키라이브’ 재키 유 대표의 통계에 따르면 2018년 현재 우리나라에서 20가지 이상의 싱글 몰트 위스키와 전문적인 칵테일을 제공하는 바는 300여 곳에 이르고 그보다 조금 캐주얼한 바도 대략 1000곳 이상이 영업 중이라고 한다. 같은 기준으로 2013년에 영업 중인 바는 69곳뿐이었으니 꽤 가파른 성장세다. 이는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런던, 파리, 뉴욕, 도쿄, 홍콩 등 트렌드를 선도하는 도시에서 파인다이닝의 미식 문화가 급속하게 발달하면서 술도 취향에 맞게 골라 마시는 잔술(바이더글라스·by the glass) 문화가 일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칵테일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준벅’이나 ‘블루하와이’ 같은 알록달록한 색상과 강렬한 이름을 가진 디스코텍 시대에 탄생한 칵테일이나 제조가 쉽고 간단한 ‘잭콕’ ‘블랙 러시안’과 같은 칵테일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묘기를 보여주는 웨스턴 콘셉트 바나 모던바로 통칭되는 토킹바나 섹시바는 아예 논외로 한다.
혼술의 시대와 만난 크래프트 칵테일 혁명
오늘날 잔술 시대에 다시 각광받고 있는 칵테일은 전적으로 2000년대 뉴욕을 시작으로 크게 번진 크래프트 칵테일 혁명의 우산 아래 있다. 미국의 발명품인 칵테일은 1차 전성시대라 불리는 골든 에이지(1860~1919)에 꽃을 피운 뒤, 금주법 시대(1920~1933)를 거치며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60년대부터 일본을 제외한 전 세계에서 한 잔 놓고 음미하는 품위 있는 술에서 쉽게 취하게 만드는 술, 싸구려 음료로 점점 개념이 변질되어 갔다. 크래프트 칵테일 혁명이란 혼탁해진 칵테일의 싸구려 이미지를 벗어나 전문 지식과 기술을 갖춘 바텐더가 좋은 재료와 정성으로 만드는, 골드 에이지 시대의 ‘완벽한 한 잔’으로 되돌리자는 운동이다.
따라서 크래프트 칵테일은 골드 에이지 시대의 정통 레시피와 제조 방식을 따르며, 그 안에 깃든 라이프스타일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질 좋고 깨끗한 얼음 등 최대한 신선하고 품질 좋은 재료만으로 제조하고 각 메뉴에 적확한 잔에 담아 제공하는 식의 규칙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예전 멋졌던 시대의 칵테일을 그 당시의 까다로운 방식으로 정성을 들여 구현하는 것부터 완벽한 한잔을 손님에게 내주기 위해 질 좋은 재료로 정성을 다해서 만드는 창의적인 칵테일까지 모두 크래프트 칵테일이라 부른다.
크래프트 칵테일은 칵테일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제2의 전성기를 여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칵테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세계적으로 다시 유행하는 음료로 만들었다. 기존 바텐더의 개념과 경계를 짓는 의미로 믹솔로지스트라는 용어까지 탄생했다. 이런 흐름은 우리나라에도 이어져 크래프트 맥주의 유행과 싱글몰트 위스키의 짧은 유행 이후, 새로운 음주 문화로 각광받는 중이다.
혼술, 칵테일, 스피크이지 바의 은밀한 트라이앵글
크래프트 칵테일이 처음부터 유행했던 건 아니다. 그러다 금주법 시대의 비밀 술집을 흉내 낸 스피크이지 바 콘셉트를 차용하면서 빠른 속도로 대중화 되었다.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신기하고 새로운 공간에서 전문성과 정성이 담긴 완성도 높은 칵테일을 제공하는 스피크이지 바는 뉴욕에서 시작해 곧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스피크이지’는?문자 그대로 ‘조용히, 들키지 않게 하는 말'을 뜻한다. 1920년대?금주령 시대에 경찰의?단속을?피해?지하실 등에 은밀하게?만든?무허가?술집이나 밀매점을?일컫는?용어로, 이발소, 꽃집, 일반 슈퍼 등 의심을 사지 않을 만한 가게 뒤에 몰래 공간을 만들어 아는 사람만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당연히 간판은 걸지 않았으며, 심지어 암호도 있었다. 이런 스피크이지 바 콘셉트는 SNS 세대를 흥분시키는 새로운 경험이자 특별한 문화로 다가왔다. 우리나라에서도 2012년 한남동을 시작으로 청담동, 강남, 연남동 등으로 확산되는 중이다. 2015년 문을 연 광화문 포시즌 호텔의 바 ‘찰스H’는 지하의 어느 기둥에 은밀하게 숨겨진 문을 찾아야 입장할 수 있는 특이함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비밀스런 장소에서 제공하는 칵테일과 싱글몰트 위스키의 유행과 함께 건너온 클래식한 일본 바의 잔술 문화가 혼술의 시대로 접어든 이 시점에 본격 상륙하면서 칵테일은 새로운 음주 문화로 주목받고 있다. 《칵테일의 모든 것》은 바로 이런 문화적 맥락을 품고 탄생한 책으로, 칵테일 문화가 가진 라이프 스타일, 즉 술 한 잔 즐기는 태도와 지혜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