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임을 포기한 순간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인간다움의 의미
금기를 넘어서는 상상력의 작가 전혜정이 던지는 야심찬 질문
2007년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전혜정의 첫 장편소설 『첫번째 날』이 출간되었다. 첫 소설집 『해협의 빛』(문학동네, 2012)을 출간한 이후 장편 집필 작업에 매진하며 수없이 원고를 다듬어낸 결과물이다. “알레고리 판타지에서 정통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향 모두에 있어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야말로 올 라운드 플레이어다”라는 등단 당시의 심사평이 말해주듯, 전혜정은 소설이라는 영토 어느 한 부분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영역을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내딛는 작가다.
‘첫 장편’이라는 타이틀에서 오는 부담감이 있을 법한데도, 작가는 자신에게도 낯설 소재를 과감하게 택했다. 지구를 모행성으로 삼고 있는 ‘네이처’와 무인 행성 ‘루시아’가 바로 그것이다. 현실과 다른 새로운 가상의 시공간은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킬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인간다움’의 의미를 탐색하는 데 걸맞은 장소가 마련된다.
일급 살인을 저지르고 무인 행성 루시아로 추방된 ‘DH-194’,
완벽한 추위와 어둠 속에서 운명을 결정지을 첫번째 날이 밝아온다
800년의 역사 동안 큰 전쟁도 사건도 없이 평화롭던 네이처 행성에서 모두를 경악하게 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한 청년이 고아인 자신을 보살펴주었던 보호자를 살해한 것. 이 사건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버지나 다름없는 인물을 잔인하게 죽였다는 점에서도 모두를 분노하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네이처의 신분제 하위에 위치한 5계급 출신이 상위 계급인 정부 관리자를 살해했다는 점에서도 사람들을 충격으로 몰아넣는다. 때문에 일급 범죄를 저지른 그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이 내려진다. 생명체와의 공감과 교류를 최우선시하는 네이처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처벌인 유배형이 내려진 것. 그렇게 ‘DH(Different Human)-194’라는 이름이 붙여진 채 일급 범죄자 ‘나’는 무인 행성 루시아로 쫓겨난다.
이후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담을 방불케 하는 ‘나’의 생존기가 펼쳐진다. 다른 점이라면 섬 생활을 즐긴 로빈슨 크루소와 달리 ‘나’를 기다리는 건 괴생명체의 습격과 완벽한 고독일 뿐이지만. 숲과 바다를 헤치며 끈질기게 목숨을 이어나가던 ‘나’는 어느 날 새끼 동물과 마주하게 된다. 추위에 파들파들 몸을 떠는 이 연약한 생명체는 네이처 시절 불우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고, ‘나’는 그에게 ‘렘’이라는 이름을 붙인 뒤 함께 지내게 된다. 마치 ‘나’와 정부 관리자의 관계가 역전된 듯한 렘과 ‘나’의 관계. 네이처에서 그 둘의 결말이 비극이었듯, 렘과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또한 잔인한 미래일까.
여기까지 읽고 나면 우리는 전혜정이 현실과 다른 우주를 가정해 ‘네이처’와 ‘루시아’를 만들어낸 이유에 대해 짐작하게 된다. 생존은 가능하지만 다른 인간은 살지 않는 무인 행성. 그곳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밑바닥까지 샅샅이 살펴볼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타인의 존재가 부재한다는 것은, 매 순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의지대로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뜻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 그러한 조건을 고려하면 “살아남기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자신이 인간임을 어느 정도 포기했다는 뜻이다”라는 소설 속 인물의 독백이 조금은 다르게 다가온다. 인간임을 포기하고 되는대로 살고 있을 때 자신에게 손을 내민 정부 관리자처럼, 루시아에서도 인간임을 포기하고 생존만을 목표로 구질구질하게나마 삶을 이어가고 있을 때 ‘나’가 어떤 존재인지 실험하려는 것처럼 ‘나’ 앞에 렘이 등장하니 말이다. 그러니 이 순간 ‘첫번째 날’이라는 제목은 루시아에서 처음으로 눈을 뜬 그 순간뿐만 아니라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 뒤엉키며 되레 ‘인간다움’의 의미에 눈을 뜬 그때를 지칭하는 의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