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보르헤스 논픽션인가?
보르헤스는 1980년대 말 국내에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이 소개되면서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단편소설집 『픽션들』이 꼭 읽어야 할 필독서로 꼽히지만, ‘어려운 작가’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붙었다. 2000년대 시작된 ‘인문학 다이제스트’ 열풍에서도 한 발짝 빗겨 서 있던 신비의 거장, 보르헤스. 그를 쉽게 읽고자 하는 독자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진리와 중심을 부정하는 보르헤스의 사유는 한 문장으로 수렴될 수 없었고 그의 언어에 주석을 달면 달수록 옥상옥(屋上屋)이 되는 현상을 피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일생을 표류하면서 살았고, 조언할 말은 한마디도 없다.’
만년의 보르헤스에게 젊은이들을 위해 조언을 한마디 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시대의 멘토가 되기를 거부했던 자유경의 목소리는 어떻게 그의 작품을 읽어야 하는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힌트를 준다.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은 그런 의미에서 보르헤스를 만나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장 유용한 지도가 될 것이다. 한 번쯤 『픽션들』, 『알레프』를 펼쳐 들었으나 복잡한 표식과 난해한 상징에 완독을 포기했던 독자들이라면, 먼저 논픽션을 만나 보자. 청년 보르헤스의 사유가 태동하는 시기부터 지적 자만심을 숨기지 못하는 패기만만한 장년기를 지나 자신만의 소우주를 탄생시키는 완숙기까지, 그의 모든 여정을 담았다. 이 사유의 지도를 통해, 픽션 속 모든 장애물은 보르헤스의 미학적 토대 위에 세워진 눈부신 랜드마크였음이 드러난다.
“가령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 보르헤스는 “거울과 부권(父權)은 가증스러운 것이다. 그것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증식시키고, 분명하게 그런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에 대한 보르헤스의 개인적인 설명을 ‘7일 밤’의 「악몽」에서 찾을 수 있고, 왜 그가 그토록 악몽이나 꿈 혹은 거울에 집착하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 3 『말하는 보르헤스』 작품 해설 중에서
그동안 소수 독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보르헤스. 그러나 이제는 당신도, 이제껏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풍부한 상징과 형형한 의미의 편린을 홀로 목격하는 ‘보르헤스적 경험’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청년 보르헤스의 산문집,
20세기 지성사를 뒤흔들 세계관의 태동
■ 20대 보르헤스의 초기 사유를 읽다
미로처럼 얽힌 복잡한 골목길에서 탄생한
보르헤스 문학의 기원
보르헤스는 27세가 되던 1926년에 프로아 출판사를 통해 에세이집 『내 희망의 크기』를 선보였고 이후 그의 작품 목록에서 영원히 추방했다가 다시 작품의 일부를 프랑스어로 번역해 플레야드 출판사의 작품집에 포함시켰다. 이 작품의 전문은 보르헤스 사후에 부인 마리아 코다마에 의해 온전히 복원되었다. 그녀는 이 책의 서문에서 “보르헤스가 향후 우리에게 끊임없이 제기할 모든 문제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아직 젊을 때임에도 보르헤스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대한 사랑과 보편성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이미 균형을 잘 잡고 있다.”고 그 의의를 표현한 바 있다.
지역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나 전 세계적인 주제와 소재에 천착한 보르헤스는 오늘날 세계주의 작가로 평가된다. ‘상호 텍스트성’이나 ‘저자의 죽음’이라는 화두로 20세기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끌었던 그는 어릴 적부터 다양한 언어를 습득했고 여러 문화권의 저작물에 접근이 용이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 1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는 보르헤스의 문학적 토양이 된 근원에는 역시 라틴아메리카, 부에노스아이레스, 더 깊숙이 보면 “위험한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 있고 노을로 붉게 물든 하늘이 훤히 보이는” 팔레르모의 어느 변두리였음을, 이 공간들이야말로 보르헤스적 상상력의 풍요로운 원천이었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1부 『내 희망의 크기』
이 작품은 그의 전체 작품 속에 녹아 있는 ‘크리오요’, ‘팜파스’, ‘문학과 언어’에 대한 애정과 우려 등을 담고 있다. 그는 크리오요주의를 “세상과 개인, 신은 물론 죽음과도 소통하는 철학”으로 정의하며 아르헨티나의 원초성을 되살린다. “팜파스는 성스러운 곳이고, 가우초야말로 정말 사내다웠으며, 변두리는 확 트인 부드러운 지역이고, 건달들은 활력이 넘쳤다.”, “정원에는 하늘도 잠깐 쉬었다 가는 미개간지가 있고, 파란 하늘과 포도 덩굴을 벗 삼아 소녀들이 뛰어놀았다. 달빛이 더욱 외로워 보이는 해질 무렵에는 가게 뒷방에서 강한 맥주 냄새와 함께 불빛이 새어 나왔고, 동네 어디에서나 늘 싸움이 벌어졌다.”라는 시적 묘사 속에 ‘보르헤스의 아르헨티나’가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아르헨티나의 언어성에 대한 고찰, 크리오요 문학 작품과 스페인 및 영국 문학 작품의 분석이 이어지며 루고네스, 루이스 데 공고라, 케베도 등에 대한 초기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점도 흥미롭다. 역자 김용호 교수는 이 작품이 “삶을 긍정하고 기쁨의 원천으로 삼았던 가우초를 복원시키고, 콤파드리토들을 가우초의 생명력을 도시로 가져온 영웅으로 바라봄으로써 아르헨티나의 새로운 문화를 정립하고 허무주의를 극복하려고 시도”했다고 설명한다.
2부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언어는 항상 자신을 감동시키고 고양시키지만 그에 대한 의심 또한 그치지 않았던 보르헤스는 「단어의 탐구」,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에서 ‘어떤 심리적 과정을 거쳐 한 문장을 이해하는가?’라고 물음을 던지며 인지언어학적 관심을 펼친다. 「글로 쓴 행복」, 「또다시 은유」, 「세르반테스의 소설적 행동」등에서는 날카로운 비평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며 「탱고의 기원」, 「두 길모퉁이」 등에서는 아르헨티나의 민족적 전통과 그 기원을 찾는 탐험이 그려진다.
“문학의 영속적인 목표가 운명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문학이 우리 삶의 핵심이 되는 단어를 이미 다 말했고 문법과 은유를 통해서만 혁신이 가능하다고 믿는 경우가 많다. 나는 감히 이를 부정한다. 미분화(微分化)된 노동은 넘쳐 나고 영원한 것, 즉 행복과 죽음, 우정에 대한 유효한 표현은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등 문학이란 무엇인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궤도 또한 곳곳에 녹아 있다. 역자 황수현 교수가 “민낯의 보르헤스”라고 쓴 것처럼, 형이상학적이고 난해한 보르헤스 이전의 “다소 공격적이거나 비판적이며 때로는 유머로 눙을 치는” 혈기 왕성한 보르헤스를 만나 볼 수 있다.
3부 『에바리스토 카리에고』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의 좌절과 실패를 따뜻하게 노래한, 19세기 말을 대표하는 시인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에 대한 산문집이다. 역자 엄지영 교수의 표현처럼 “전기라는 장르의 규칙에 대해 비판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카리에고라는 시인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기술하는 일종의 전 텍스트”로서 “새로운 글쓰기의 실험”을 형식에서부터 공고히 한다. 한 시인의 삶과 기억의 편린, 그가 남긴 시를 다루면서도 「탱고의 역사」, 「말 탄 이들의 이야기」, 「단도」 등에서는 20세기 초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의 근원적 의미와 풍요로운 전설까지 다채롭게 복원한다. 생명의 원초적 힘을 상징하는 아르헨티나인들의 태도, 그 호전적인 힘과 함께 독립적인 개인을 넘어서는 영원성, 증식하는 미로, 여러 시간이 공존하는 미학적 사건이 어우러지는 작품이다.
“우리가 운명을 고백하고 운명에 대해
어렴풋하게 추측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든 것이 시적이다.”
시를 무엇보다 사랑했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청년
“우리는 세상보다 작지 않기를 바라고, 세상만큼 커지기를 원한다.”, “진실로 존재했던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치열함은 영원의 한 형태이다.” 보르헤스는 언어, 은유, 시, 문학 전반에서 예민하게 사유를 다듬어가면서도 동시에 문학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이 확고했다. 아직도 우리의 문학은 끝에 다다르지 않았으며 더욱 풍요로워질 일만 남았다는 빛나는 미래를 믿게 한다.
이제까지 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보르헤스가 난해하고 현학적인 작가로 읽혔다면 이제 그의 논픽션을 접할 때다. 고요한 현자의 시와 문학 작품에 대한 단호한 평가, 아르헨티나 언어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날카로운 비판, 그를 매혹했던 미학적 표현과 그를 좌절하게 만든 은유를 함께 짚어 나가다 보면 보르헤스를 감싸고 있던 불투명한 안개가 맑게 개일 것이다.